한줄 詩

꽃 속으로 추락하다 - 홍성식

마루안 2018. 4. 28. 19:27

 

 

꽃 속으로 추락하다 - 홍성식

 

 

일없이 서둘러지는 발걸음 아래

아름다웠던 전설은 파지처럼 밟히고

사람들 휑한 가슴마다 쓸쓸한 썰물

눈이 부신 한낮의 아스팔트 위

꽃잎들 비명으로 흩어진다

 

겸허함을 거세당한 상승의 욕망

한 번 올라간 건물은 다시 고개 숙일 줄 모른다

층층이 블라인드 쳐진 그곳에선

우리와 등돌린 비밀스런 거래가 밤낮 없이 행해지고

먼지바람의 철거민촌

아이들은 더 이상

꽃잎의 은유가 아니다

 

꽃의 시대가 목말랐던 그들

맨발로 겨울산을 헤매 다녀도

무더기로 피어있을

진홍빛 희망을 잃지 않은 가슴은

눈보라 채찍 앞에서

꺾인 무릎 다시 세웠다

 

이제는 떠도는 이야기로만 남았지만

올해도 그 산에선 사람보다

필경 꽃이 먼저 올 것이다

이제 봄이면 도로마다, 광장마다

꽃잎들 함성으로 난분분(亂粉粉)할 텐데

살점 터뜨리며 기어온 시린 얼음장

단숨에 녹여내며 주저 없이

꽃과 함께 추락해

핏덩이로 뒹구는 꿈만으로도

겨울은 이미 겨울이 아니다

 

 

*시집, 아버지꽃, 화남

 

 

 

 

 

 

그리고, 살아있었다 - 홍성식

 

 

프랑스 혁명사를 읽으며

수음의 횟수를 반으로 줄였고

랭보의 시 속에서

어쩔 수도 없는 운명을 확인했다

레닌의 삶에서 외로운 자,

켤코 외로울 수 없는 변증법을 읽었고

실패한 혁명가의 감옥행에

우울한 눈물 숨어서 혼자 훔쳤다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에 기초한다는

광신으로,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고로, 진실로 사실 같지 않은 현실을

묘사보다는 서술했다

이 모든 것의 한가운데로

아버지 흰머리 늘어갔고

나는 몸을 팔았다

아주 헐값에

 

달릴 것인가? 멈출 것인가?

그래, 이젠 비유로 묻지 말고 이렇게 물어다오

그럼 눈물 덜 마른 젖은 눈 번득이며

망설임 없이 답해주마

거부하는 자, 영원히 살아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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