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이 버려진 골목 - 백인덕

마루안 2018. 4. 27. 22:47



꽃이 버려진 골목 - 백인덕



저녁 창 아래 버려진 꽃,
비 오는 골목 끝에서
뒤집힌 우산이 홀로 춤춘다
시린 뼈대로 지탱했던
꽃무늬 나일론 같은 세상을 찢으며
날아오르지도, 어디론가 숨어버리지도
못하는 쓸쓸한 꿈, 한 번쯤 나는
그 남자의 젖은 등을 본 듯도 하지만
단 한때의 일을 기억해내기에도
모든 추억을 뒤집듯 힘겨웠다.
푸른 창틀이 젖어가는 집들마다
환하게 불을 켰지만
그 집만이 버려진 어둠 속에서 빛났다.
자정이 넘도록
절망적 풍경을 뒤엎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완고함이
골목 안 대여섯 집을 잠재운 다음
아아, 쇠처럼 굳은 뼈를 열듯
열리며 망가지는 낯선 소리.
한 울음이 세상을 버리고 온
우주를 껴안는 것을 보았다.
비 갠 하늘이 높이 치솟아 있었다.



*시집, 끝을 찾아서, 하늘연못








행복의 조건 - 백인덕



나는 행복하다.
강 건너 도착하는 마을에 집이 있고
언제나 차고 매운 바람이 불고
바람은 앞에서만 불고
너무 늦은 시각이라도
紅燈마다 당신들의 고향을 써 내건
단속 없는 포장마차가 즐비하고
더러는 낯익어 매번 같은 안부를 물어오는
큰 누님뻘의 아주머니가 있고
아아, 아직은 취할 정신이 있고
몸을 내던질 풀숲이 온전하니
나는 행복하다.
아무리 취했더라도 골목 끝, 내 집임을
알려주는 근방 유일의 목련이 서 있고
사뿐 담장을 타고 넘을 재주도 있고
불꺼진 방 손잡이들은 안녕하시고
책상 가득 쓰다만 시와
오늘 죽은 시가 널려 있고
시들의 홀로코스트를 목도하며 내일의
시는 더운 김으로 피어나고
무럭무럭 자라 병이 되고
또 나를 더욱더 병신되게 하리니
나는 행복하다.
몸 구겨 내던진 아침마다 더러운 먼지와
순결한 빛 사이 재생원고지처럼 살아나는
아아, 아직 나는 푸르디 푸른 빈칸이어서
끝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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