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 진 자리 - 정일남

마루안 2018. 4. 28. 19:57



꽃 진 자리 - 정일남



그가 말을 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가니
스스로 알아서 마음에 새긴다
꽃피는 아픔은 길고 머무는 시간은 짧다는 것
왜 입들은 말이 없는지
내는 겪어보아 알겠다
꽃은 성공이고 완성이니
꽃이 지면 다른 꽃이 온다는 선약이 있다


피곤한 자의 영혼은 맑아진다
사랑해줄 상대가 없어도
꽃은 오고 햇살은 땅에 꽂힌다


올봄에도 그가 왔다가 가는 모습을
기억하려고 그의 눈썹을
서랍에 저장해두기로 한다
꽃이 떨어진 눈물 자국은
그 자리가 진과(珍果) 돌아오는
자리임을 믿는다



*시집, 감옥의 시간, 시와에세이








무진행 - 정일남



꽃에는 규범이 없다
이데올로기가 없으며 헤게모니가 없다
이런 꽃이 내 둘레에 머물다 간다
배우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
꽃은 아름다움이란 무기와 매혹이란 향기다
슬픔이 담력이라 여겼을 때 꽃이 아름다워진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겠다는 관심은 없고
제각기 이미지만 남기고 가는 거다
꽃피는 시기는 하늘과 땅이 정해주면 그 뜻에 따른다


나는 과일 속 벌레의 고독을 간직하고 살았을 뿐
꽃이 피는 순간을 보지 못했고
꽃이 떨어져 어디로 가는지
행적을 알지 못했다
다함이 없어 끝을 모르고 가는 거다





# 정일남 시인은 1935년 강원 삼척 출생으로 관동대 상학과를 중퇴했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당선, 198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느 갱 속에서>, <들풀의 저항>, <야윈 손이 낙엽을 줍네>, <기차가 해변으로 간다>, <추일 풍경>, <유배지로 가는 길>, <꿈의 노래>, <훈장>, <봄 들에서> 등이  있다.


약력을 보면 시인은 우리나라 석탄산업의 성수기인 지난 1961년 태백의 장성광업소 채탄광부로 입사해 1980년까지 막장에서 석탄을 캐는 말단광부였다. 20년 탄광 생활을 마감하고 상경해서 문방구도 하고 젖소도 키우면서 가장 노릇을 했다. 지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회한도 있다. 팔순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현역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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