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늦은 오후의 식당 - 엄원태

마루안 2018. 4. 25. 22:15



늦은 오후의 식당 - 엄원태



그 식당 차림표에는
열 가지가 넘는 메뉴가 준비되어 있고
가격 또한 저렴한 편인데
가령, 낙지볶음은 한 접시에 기껏 오천원이다


홀 한쪽에는
주방으로 쓰는 씽크대와 장탁자가 있고
식탁은 세 개
의자는 열세 개 있다


손님은 하루 평균 여남은 명인데,
어쩌다 술손님 한팀 받기라도 하는 날이면
주인아줌마는 기꺼이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을
내줄 준비가 되어 있다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그 식당이
텅, 텅 비어 있던 어느날
나는 거기서 짠 국밥 한 그릇을
신김치와 콩나물무침으로 먹은 적 있다


어쩌다 이렇게 조용한 주택가 길목에
이런 식당이 허술하게 문을 열고 있담,
생각하는 것이 상식, 그 상식을
보기좋게 뒤집으며 식당은 거기 있는 셈인데....
한번은 세무서에서 나온 젊은 주사가
조용히 업종전환을 권유한 바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식당 아줌마는 늘 준비해놓은 반찬 중에서
날짜를 못 이겨 상하기 직전인 것만으로
자신의 식사를 해결하곤 하는데,
그 처연한 혼자만의 식사를
그 앞을 지나다니며 무심히 몇 번 보았다


삶이란 게 그런 것은 아닌가,
쉬어빠지기 직전의 음식을 어쩔 수 없이
혼자서 느릿느릿 씹어대는, 어떤, 말로는 다 못할
무심함 같은, 그런 나날들의 이어짐....



*시집, 물방울 무덤, 창비








한낮의 식당 - 엄원태



햇살 밀가루처럼 흩어지던 봄날
한낮의 식당은 조용하고,
추리닝 차림 수염자국 짙은 사내 하나
뒤꿈치 구겨신은 맨발을 외로 꼬아 흔들며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느릿느릿 먹고 있다


식당 아줌마는 그를 익히 아는 듯
빈 탁자에서 나물 다듬으며 곁눈질조차 않는데,
아줌마는 그의 직업이며 가족들을
몇번이고 속으로 짐작해보곤 했을 테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사내는 아마도 가족이 없거나
얼마간 떨어져 지내는 고등 룸펜쯤일 것이다
아줌마는 그의 직업이며 가족들을
몇 번이고 속으로 짐작해보곤 했을 것이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어쨌거나 그는, 사람들의 염려와 관심에서
한참 놓여나 외롭게 지내왔고,
또 그렇게 살아가다 어느날엔가, 사라질 것이다
밥을 사먹던 그가
어느날부터 식당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만, 사라짐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안부나 향후가, 세상 누군가의
근심에 덧붙여지지 않는 것처럼
텅 텅 빈....
백지장같이 환한 나날들....
그렇게 멀고
아득하던 봄날의,





# 유난히 쉼표와 말줄임표가 많이 들어있는 시가 긴 여운을 남긴다. 시를 읽으면서 이렇게 부호에 관심을 두고 읽은 시가 있었을까.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고 싶은 것이 시인의 의도였을까. 밥 먹는 일만큼 거룩한 일도 없는 것,, 이래 저래 묘한 슬픔이 묻어 나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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