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대체로 사는 건 싫다 - 여림

마루안 2018. 4. 24. 20:15



대체로 사는 건 싫다 - 여림



대학 중퇴의 학력은 고졸이라는 출판사 사장과의
면접에서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 뒤 방송국 스크립터로
일하는 대학 동창을 만나 늦도록 술추렴을 하다 귀가한
다음날 나는 책상 위에 커다랗게 대체로 사는 건 싫다
라고 써붙여 두었었다. 며칠 후 퇴근길에 소주 두 병을
사들고 들른 녀석은 대강 대강 사는 것이 싫은 것이냐
사는 것이 대체로 싫은 것이냐며 농짓거리처럼 슬몃
물었다 뜬금없는 그 말에 별 수 없이 객적게 웃어넘기긴
했어도 자리가 파한 후 혼자 막잔을 비우기까지 나는 퍽
막막했었다. 어쩌면 나는 그리 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정규 대학을 졸업하고 웬만한 직장에 자리를 잡아 다달이
월급에서 주택부금과 자동차 할부금을 곶감 꿰듯 부으며
괜찮은 여자와 결혼을 해 밤톨만한 아이들을 내리 두고
몇 번의 이사 끝에 허름한 서민 아파트라도 장만하는
그랬다면 대체로 사는 것이 싫다라는 생각은 소시민의
지나가는 푸념 쯤으로 여겼을 테고 그 무슨 경구처럼
책상 위에 저리 붙여두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강대강 사는 것이 싫은 것과 사는 것이
대체로 싫은 것의 차이는 확연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느 누가 한 뉘를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려 할
것이며 거기에다 목숨까지 바칠 것인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을 혼잣말에 불콰해진 얼굴로 나는
비루먹은 말처럼 느릿느릿 앉은뱅이 책상으로 기어가
구겨진 파지를 호기있게 쓸어버리며 기어이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이 중고타자기의 전원을 올린다.
 


*유고전집,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최측의농간








계단의 끝은 벼랑이었다 - 여림



전화는 언제나 불통이었다. 사람들은
늘 나를 배경으로 지나가고 어두워진
하늘에는 대형 네온이 달처럼
황망했었다. 비상구마다 환하게 잠궈진
고립이 눈이 부셨고 나의 탈출은 그때마다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살아 있는 날들이 징그러웠다. 어디서나
계단의 끝은 벼랑이었고 목발을 쥔 나의 손은 수전증을 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