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의 사서함 - 김지명

마루안 2018. 4. 24. 19:57



꽃의 사서함 - 김지명



근처 어디에도 내가 없어
들판에서 혼자 그려낸 만큼 피우고 섰다
그의 눈에 띄기 위해 그를 눈에 담기 위해
먼 길 통증도 분홍의 의지로 편입시켰다


나는 손이 시려도 잡을 수 없는 연인일지 모른다
나는 재미없는 정물이라고 풍장됐을지 모른다


익명으로 털올 바람이 배달되고
자살하지 않을 만큼 슬픔이 배달되고
나는 내 얼굴을 몰라
몸속 깊이 함의한 그가 좋아한 색깔도 몰라
의심의 꽃대궁으로 그를 기다린다


말문 트는 입술을 훔쳐 건너온
오해의 여분만큼 그를 이해할 시간


꽃잎마다 그를 앓는 편지를 쓴다
어딘지 좀 채도가 부족한 생각일까
가끔 거부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
갖고 싶은 사람을 소유한 사람의 여유랄까
그가 잠시 빌려온 남의 애인이었으면 좋겠다
나침판 없는 시계를 찼으면 좋겠다
내 희망이 바삭 구워지기 전에


매음굴이라는 말로
공작소라는 말로
누군가 내 목을 따 갔다
그건 내 아름다움을 진술한 방식
어느 꽃씨 부족을 발성하는
그가 사는 거울



*시집, 쇼펜하우어 필경사, 천년의시작








나비 공화국 - 김지명



너무 많은 꽃들을 스쳐 왔다
들녘이거나 골짜기 어디쯤에서 만난
꽃들의 행방은 모르는 걸로 한다


길 건너 나비가 나를 복사한다
나를 훔쳐간 눈동자 속
달콤한 입술 달래어 더듬거나
구름판 굴러 땅을 훑고 가는 활개 소리가
비구름의 행보에 나비잠 들 것이다


연두가 녹두 빛으로 빛날 때
둥근 생각으로 별과 달을 돌던 꽃과 나 사이
모난 아이들이 태어났다고
바람이 물 위를 걸어와 요람을 펼치는 저녁


표정을 지운 표본실에 눕는다
봄여름 구겨 넣은 날개의 고정 핀이 위태롭다
장다리꽃 울타리를 고양이 울음 따라 넘었는데
외줄 거미 그네를 타고
푸른 하늘 흐르는 구름에 앉았는데
하수의 둔치에서 파닥거리던
행려의 명함
내 잔상을 건너온 당신을 인화한다
말투를 따라하고
취향에 굳이 동의하고
후생으로 목걸이까지 목에 건
꿈꾼다는 말
남의 꿈을 빌리러 간다는 말이다


꿈 밖 누구에게 근사한 모자 씌워 주고
몽생과 몽사 사이를 날아가는





# 독특한 제목을 갖고 나온 시집 <쇼펜하우어 필경사>에서 나는 이 두 편을 대표작으로 꼽는다. 꽃과 나비가 나와서일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몽환적인 싯구가 읽을수록 가슴에 쏙쏙 박힌다. 상여 지나간 자리처럼 복사꽃 핀 풍경은 꿈에 봐야 더 아름다운 것일까. 꿈에서든 현실에서든 꽃은 피기 전에 이미 아름다움을 누설했고 지고 나서는 꽃잎을 밀어낸 자리에 연두빛이 쓸쓸하다. 이것도 나 만의 시 읽는 방식이다. 앞으로의 시편이 기대되는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