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 권대웅

마루안 2018. 4. 24. 19:47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 권대웅



지나간 그 겨울을 우두커니라고 불렀다
견뎠던 그 모든 것을 멍하니라고 불렀다
희끗희끗 눈발이 어린 망아지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미움에도 연민이 있는 것일까
떠나가는 길 저쪽을 물끄러미라고 불렀다


사랑도 너무 추우면
아무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표백된 빨래처럼 하얗게 눈이 부시고
펄렁거리고 기우뚱거릴 뿐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봄 햇빛 한줌


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 불렀다
그 곁을 지나가는 바람을 정처 없이라 불렀다
떠나가고 돌아오며 존재하는 것들을
다시 이름 붙이고 싶을 때가 있다
홀연 흰 목련이 피고
화들짝 개나리들이 핀다
이 세상이 너무 오래되었나보다
당신이 기억나려다가 사라진다


언덕에서 중얼거리며 아지랑이가 걸어나온다
땅속에 잠든 그 누군가 읽는 사연인가
그 문장을 읽는 들판
버려진 풀잎 사이에서 나비가 태어나고 있었다
하늘 허공 한쪽이 스르르 풀섶으로 쓰러져내렸다
주르륵 눈물이 났다
내가 이 세상에 왔음을 와락이라고 불렀다


꽃 속으로 들어가 잠이 든 꿈
꽃잎 겹겹이 담긴 과거 현재 미래
그 길고 긴 영원마저도
이생은 찰나라고 부르는가
먼 구름 아래 서성이는 빗방울처럼
지금 나는 어느 과거의 길거리를 떠돌며
또다시 바뀐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시집, 나는 누가 살다간 여름일까, 문학동네








저녁이 젖은 눈망울 같다는 생각이 들 때 - 권대웅



눈은 앞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뒤를 볼 수도 있다
침묵이 아직 오지 않은 말을 더 빛내듯
보지 않은 풍경을 살려낼 때가 있다
눈을 감았을 때
바보의 무구한 눈망울을 보았을 때
마음의 뒤란에 가꾸고 있는 것이 많을 때
뒤를 만지듯
얕은 것보다 깊은 것들을 살려내는 눈


황소의 젖은 눈처럼 저녁이 온다
꿈벅거리는 큰 눈 속으로 땅거미가 진다
땅속이 환해서 뿌리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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