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빈 화분 - 김점용

마루안 2018. 4. 25. 22:46

 

 

빈 화분 - 김점용


베란다에 빈 화분이 하나
오래 전부터 놓여 있다

언젠가 분재에 열중인 사람에게
어린나무를 너무 학대하는 거 아니냐고 넌지시 묻자
화분에 옮겨진 자체가 모든 식물의 비극 아니겠냐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빈 화분
그동안 실어 나른 목숨이 몇이었는지 모르지만
생각하면 나를 옮겨 담은 화분도 아득하다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던
가족, 학교, 군대, 사랑, 일터, 오 대~한민국!
결국엔 우리 모두 지구 위에 심어졌다는 생각

목숨 붙은 걸 함부로 맡는 법 아니라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겁도 없이 생을 물려받고 또 물려주는지

빈 화분
그 오랜 공명이 아직
씨 뿌리지 못한
빈 몸을 울리고 지나간다

어찌하여 화분은 
화분이 되었는지


*시집, 메롱메롱 은주, 문학과지성

 

 




생명이 밉다 - 김점용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따뜻한 절벽, 한 둥지 안에 독수리 형제가 나란히 있다. 부모가 먹잇감인 바위너구리를 들고 나타나자 형은 날카로운 부리로 동생의 살을 쪼아 헤집어 먹이를 쳐다보지도 못하게 한다. 그렇게 하루나 이틀이 지나는 사이 동생은 서서히 죽어간다. 부화한 지 3일 만에 동생이 죽기까지 형은 부리로 1,569번을 쪼았다.

뱀상어는 몸속에 알을 낳는다. 그 안에서 부화한 새끼들은 자유롭게 헤엄치며 서로를 잡아먹는다. 새끼들은 이빨이 자라고 몸집이 커진다. 이들은 더 작은 새끼들을 잡아먹는다. 최후로 한 마리가 남을 때까지 이 과정은 반복된다. 그 사이 어미는 1만 7천여 개의 알을 낳아 계속해서 먹이를 제공한다.

내가 살아남은 데도 다 이유가 있다.

 

 

 

 

# 김점용 시인은 1965년 경남 통영 출생으로 서울시립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메롱메롱 은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