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살아남은 자의 슬픔 - 윤제림

마루안 2018. 4. 25. 22:37



살아남은 자의 슬픔 - 윤제림



이 별에 살던 사람들 모두 떠나 버리고
결국은 말 못하는 것들만 남아서
쉬 죽지 못하는 물건들만 남아서
더는 할 일도 없고 갈 데도 없는
제 처지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를테면 삼성 냉장고나 벤츠 자동차가
버려진 개처럼 울부짖을 때


해와 달도 진작 모습을 감추고
다른 별에서는 소식도 없을 때


그런 것들도 그런 것들이지만
질긴 목숨의 껍데기들만
끝까지 나부낄 때
동삼동 패총(貝塚)같은 처소도 못 정하고
그저 미쳐서 구르고 날릴 때
이를테면 사발면 그릇이나 새우깡 봉지들이
적막을 깨며 달릴 때


천지신명은 아무 말 못하고
UFO도 오지 않을 때



*시집, 새의 얼굴, 문학동네








세 가지 경기의 미래에 대한 상상 - 윤제림



올림픽 경기 중에 마라톤만큼 단조로운 경기도 없다.

신문 한 장을 다 읽도록 드라마 한 편이 끝나도록 같은 장면이다. 땀 얼룩의 일그러진 얼굴과 뜨거운 대지를 두드리는 나이키 운동화 아니면 검은 맨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 경기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는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시쓰기만큼 쓸쓸한 종목도 드물다. 시의 객석은 선수 가족과 동창생들 몇이서 깃발을 흔드는 고교축구대회장 스탠드를 닮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경기의 미래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섹스를 보라. 마라톤만큼 시쓰기만큼 단순하고 오래된 경기지만, 아무도 이 경기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는다.


외로우나 뜨겁기 때문이다.





# 제목은 흔한 소재를 선택했지만 밀도 있게 문장을 끌고 가면서 독자를 황홀하게 만든다. 곰곰히 생각하며 여러 번 읽게 만드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감상 후기를 쓰는 문장력은 달리지만 싯구에서 전해오는 감동은 어쩔 수 없다. 좋은 시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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