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날, 오후 4시쯤의 사유 - 이자규

마루안 2018. 4. 24. 19:31

 

 

봄날, 오후 4시쯤의 사유 - 이자규

 

 

칼 빛보다 시린 세월 사십대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의 장년시대라면 되겠는가 저문 고속도로 주변 폐차 서너 대 흉물스런 몰골이다

지천명 넘어 생각이 시간보다 힘이 센 석양쯤의 나그네

 

썩은 고목의 반쪽에서 돋아난 새잎을 외면 말자고 병든 아이들 등에 업고 시리게 너는 와서

 

하늘을 찌를 듯한 검초록을 서방 삼아

 

온 산천에 불지르고 질펀하게 농익었던 가을

 

더 열렬한 연애를 위해 자식들을 다 떠나보낸 겨울나무

 

더 아프기 전에 노래 불러야, 더 마르기 전에 울어야, 깨어 있는 지금은 오후 4시, 아직은 인생의 극광이므로

 

 

*시집, 돌과 나비, 서정시학

 

 

 

 

 

 

초록증후군 - 이자규


어찌하여 발목이며 배꼽까지 감추고
향기의 흉내만 내고 있는지

하늘로 머리 둔 것들 주름진 손등 위로 샛강 물이 흐른다

풀도 취업준비를 하는지 낮은 깃발이 수상쩍다
여기요, 지난해 그 자리
돌 틈새 행인을 부르는 민들레의 말,
아래만 보고 걷는 사람의 동공을 키운다

밟힌 만큼 굵어지는 풀의 근성
납작하게 바란 꿈
고르게 앙다문 이빨이 후끈
척추를 세운다

세상의 도린곁 웃자란 것들
시든 곁 잎을 붙잡고 가벼운 꽃 내뱉는 한숨 소리
비좁도록 소란한 골목길에서
지금 우리가 나눠야 할 꽃자리의 눈

고요의 복판에 덧칠하는 힘센 시간을 본다

 

 

 

# 이자규 시인은 경남 하동 출생으로 2001년 <시안>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우물 치는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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