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픔의 가능성 - 박시하

마루안 2018. 4. 24. 19:21



슬픔의 가능성 - 박시하



우리는 떠나면서 만났다

앞을 보면서 뒤를 보았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면,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릴 때 눈이 온다면

슬픔은 가능할까?


누구도 슬픔에 대해서 친절히 일러주지 않는다

중앙선은 흔들림이 없고

나는 반으로 나뉘는 상징이 싫다

이를테면 신호등 같은 것

목적 없는 삶은 좋다

이를테면 무모한 사랑 같은 것


눈이 내린다 질문과 답을 뭉뚱그리며

무모하게 쏟아지는 눈 속에서

보이지 않는 건널목을

배고픈 사람들이 장님처럼 우우 건너간다


모든 버스를 그냥 보내버리려고 정류장에 선 사람처럼

나는 웃는다

슬픔이 가능하지 않다면 어떤 건너편이 가능할까?

저편이 이편이 되려면 얼마나 오래 돌아가야 하는 걸까?

우리가 농담마저 망각한다면

이 슬픔의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네가 버스에게 내릴 때

나는 마침내 등대를 잃은 사람이 된다

건널 수 없는 건너편으로

하얗게 손을 흔들며 별의 말들이 사라진다



*시집, 눈사람의 사회, 중앙북스








옥수(玉水)역 - 박시하



사랑해,

공중 역사 아래 공중에게 고백을 하려다 만다

군고구마 통해 때늦은 불 지피는 할머니가

내가 버린 고백을 까맣게 태우고 있다

이 허망한 봄날


겨울을 견딘 묵은 사과들이

소쿠리에 담겨 서로 껴안고 있다

또 다른 출발을 꿈꾸는 걸까?

아직 붉다


역사가 흔들리 때

문득 두고 온 사랑이 생각났다

푸른 강물 위

새로 도착하는 生과

변함없이 떠나고 있는 生들이 일렁인다






# 박시하 시인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이화여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했다. 2008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눈사람의 사회>,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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