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가능성 - 박시하
우리는 떠나면서 만났다
앞을 보면서 뒤를 보았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면,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릴 때 눈이 온다면
슬픔은 가능할까?
누구도 슬픔에 대해서 친절히 일러주지 않는다
중앙선은 흔들림이 없고
나는 반으로 나뉘는 상징이 싫다
이를테면 신호등 같은 것
목적 없는 삶은 좋다
이를테면 무모한 사랑 같은 것
눈이 내린다 질문과 답을 뭉뚱그리며
무모하게 쏟아지는 눈 속에서
보이지 않는 건널목을
배고픈 사람들이 장님처럼 우우 건너간다
모든 버스를 그냥 보내버리려고 정류장에 선 사람처럼
나는 웃는다
슬픔이 가능하지 않다면 어떤 건너편이 가능할까?
저편이 이편이 되려면 얼마나 오래 돌아가야 하는 걸까?
우리가 농담마저 망각한다면
이 슬픔의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네가 버스에게 내릴 때
나는 마침내 등대를 잃은 사람이 된다
건널 수 없는 건너편으로
하얗게 손을 흔들며 별의 말들이 사라진다
*시집, 눈사람의 사회, 중앙북스
옥수(玉水)역 - 박시하
사랑해,
공중 역사 아래 공중에게 고백을 하려다 만다
군고구마 통해 때늦은 불 지피는 할머니가
내가 버린 고백을 까맣게 태우고 있다
이 허망한 봄날
겨울을 견딘 묵은 사과들이
소쿠리에 담겨 서로 껴안고 있다
또 다른 출발을 꿈꾸는 걸까?
아직 붉다
역사가 흔들리 때
문득 두고 온 사랑이 생각났다
푸른 강물 위
새로 도착하는 生과
변함없이 떠나고 있는 生들이 일렁인다
# 박시하 시인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이화여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했다. 2008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눈사람의 사회>,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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