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아편 - 김유석

마루안 2018. 4. 23. 22:29



봄.아편 - 김유석



1. 기억의 정체


방백(傍白)하듯, 꽃이 피는 무렵이다.


들이키면 휘발유 냄새 나는 바람과
주사바늘 자국 어룽거리는 햇볕의 창백한 손목,
담장 가에 몰려 조는 햇병아리들의 잔상 몽롱한
벌써 누가 다 살아버린 것 같은 황홀한 폐허에서


리허설인지 습작인지
복화술로 피어나는 꽃들에게
해마다 똑같은 기별 익명으로 물으며
갈수록 조작되는 듯한 알리바이를 맥없이 지켜본다.


미래까지를 점지하기도 하던
그걸 달리 무어라 부를 수 있나


꽃이라 하겠지만 홍등(紅燈)이라 부를 것이다.
나비와 진딧물이 함께 기생하는 그 유곽에서
나는 몇 번이나 매독을 앓았다,,,,
중독되는 동안 점점 쾌락의 감각이 사라져갔고


그것이 괴로움을 즐기는 유일한 방법이 되기까지


내 안에서 피고 지던 쓸쓸한 소모품들
여전히 붉은 금단을 앓으며
망각은 추방과 같다, 우기는 내 몸을 숙주로
말더듬이처럼 피어나는 허망한 것들


2. 메멘토


당신을 찾아야만 한다.
나의 실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미안하지만
엑스트라 당신들이 필요하다.


제각각 다른 시간을 가리킨 채 멎은 시계들이 들어 있는 내 몸
어떤 시간의 태엽을 감고 추적해야 하는지
매순간 깨진 거울 속으로 끌려가
당신들의 증언으로 나를 짜 맞춰야 하는
빌어먹을 시간의 몽타주


내가 모르는 당신, 아니
너무 쉽게 잊혀졌거나 달아나버렸거나
투기와 반목으로 내 안에서 초라하게 살해당한 당신들의
그 싸늘한 기억으로부터 사이보그처럼 조립되어 나오는
나, 그리하여


가까스로 입력된 기억이란
사실의 기록인가 자기해석의 재구성인가


당신과 나의 기억 중 어느 쪽을 믿어야 하는가


3. 하여(何如)


물과 불로 세상을 다스린 사디스트
홀연 속을 등진 그이 모두 독재자를 닮았다.
독재는 아마추어리즘의 극,


기억으로 검증하는 인생은 무효다.


무슨 소용인가
간섭하지도 외면하지도 말고 오직 내버려두시길


한 철 흘리고는
말짱 잊어버리고 마는, 그로부터


열매가 맺기 시작하였고
인간은 전쟁과 질병과 미망의 자정능력을 가지게 되었으니


지금은 중독의 한철이다.



*시집, 놀이의 방식, 문학의전당








북어 - 김유석



나를 연민하는 자

독하게 두들겨 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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