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거문도 등대 - 윤향기

마루안 2018. 4. 22. 17:17



거문도 등대 - 윤향기



초적(草笛)의 애수에 무위(無爲)를 즐기는
절벽 위 방목 염소떼는
어느 해풍의 골짜기를 돌아 여기 왔을까
물결처럼 흔들리는 오랜 투시의 나날로
생의 가장 높은 절벽을 만났을 때
바다의 깊이를 사랑하게 된 등대는
어떤 간조의 시간에 처음 불 밝혔을까
수월산 동백나무숲 꽃은 지고
산나리 섬밭을 메우는 여름 끝 가을 오면
바위구절초가 눈향나무 아래 만발하리라
거문도항의 낡은 고깃배처럼
객들은 등대에 기대어도 잠 못 드는데
한낮의 햇살을 머금었던 등대는
초저녁이 되면서 적백색 섬광으로
운명의 바다에 만다라를 그리다
느리게 그 빛을 세상에 내보낸다



*시집, 피어라, 플라멩코, 시평사








생生 - 윤향기



안으로 닫아건 속리(俗離)의 상처가
뿌리부터 아파오면
목백일홍나무 꽃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갈라진 틈새로 봄 피우는
개심사에 가보아라
가서
분홍분홍 철없이 물들어보아라


바람소리 지펴 아궁이가 환해지고
나무소리 지펴 사람이 화사해지는


목백일홍나무의 옹이진 상처가 약이 되는 거기
무욕의 채마밭에서 연못 위의 목어 한 마리 바라보며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또
철없이 철없이 춤이라도 추어보아라


흠뻑 깊어져 선정에 담길 때
누가 굽어보시는가
인고이거나 장엄인
소(牛) 한 마리가 외나무 다리(一)를 건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