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짜장면 - 박수서

마루안 2018. 4. 22. 17:36



짜장면 - 박수서



중국집에서 물컵에 젓가락을 담그고
주방을 바라본다
후드득 튀어오르는 기름방울이
메리야스를 뚫는다
가슴에 화상을 입고 벌려진 상처에 연고를 바른다
너의 손이 아니리라
짜장을 볶는 손이 너의 손이었으면 좋겠다
당신 슬픔이 아직 버물려지기는 이른 오후,
암실에 숨은 꽃, 춘장의 역사처럼
내내 가슴에 얼룩을 남겼을 너의 손을 생각한다


달콤한 짜장 한 사발 후루루 말아먹고
이빨에 낀 미련까지 기꺼이 마셔버린다


내 사랑 그렇게 달고 쓴 상처로 비벼졌으면 좋으리


문 밖은 비가 내리고,
양파 때문에 콧물이 들락거린다
남겨진 검은 면발이 배갈 같은 눈물에 퉁퉁 부운 속살을 들어낸다



*시집, 슬픔에도 주량이 있다면, 북인








통조림 - 박수서


 
얼음을 알약처럼 먹어버린 수도꼭지는 떠나버린 여자처럼 녹지 않았다 창유리를 손톱으로 벅벅 긁던 사나운 년이 출몰하고, 일찌감치 해를 품어버린 소나무며, 동구밖 논길이며, 꽁무니 빼버린 까마귀 흰 뱃살과 바람난 하늘이며,


따뜻한 밥상을 걱정하던 사내는 끝끝내 수도꼭지를 울리지 못하고 담배 한 잎 속 깊은 바람으로 날려버린 후 얼어버린 손 속옷에 담가두었다 방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냉장고를 연다 통조림이 전구처럼 환하다
사내는 녹이 쓴 밥을 그릇에 담고, 통조림 한 통 피부를 벗겨내듯 조심스레 연다 그리하여 새 것을 방금 따서 밥 위에 올려 먹었으니 함박눈을 먹듯 감칠맛나는 밥상이다


통조림통에 재를 턴다 그러다 번쩍 통의 종아리에 주홍글씨처럼 박혀 있는 숫자가 안경의 테를 넘긴다. 유통기한이 한 참 지났구나  허나 사내는 아무 문제가 없다 철이 지난 꽃을 그리던 기억처럼 그저 혀가 사알작 들썩거렸다. 덜컥 들통나지 않았다면 아무 거리낌 없는 만찬이다


사내는 웅얼거린다 유통기한을 훌쩍 넘긴 통조림을 먹어도 아무 일이 없는데, 대체 유통기한이 어디까지 진정성이 있단 말인가 내내 생각하다 한참 허리춤을 내리고 자신의 물건을 바라본다
사내는 유통기한을 묻는다
눈이 펑펑 내리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