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나무 아래가 무덤 속 같다 - 이운진

마루안 2018. 4. 21. 23:40

 

 

꽃나무 아래가 무덤 속 같다 - 이운진


봄볕 앞에 망설인다
목련과 산수유
바람이 잠시 쪽잠에 빠져들면
눈빛 걸어둘 곳이 없다
놀이터의 아이들은 종일 두꺼비 집을 지어
꽃잎을 숨기고
발 디디는 곳마다 후두둑
소름이 떨어진다
온몸에 열꽃을 피우며 등이 아파오고
어김없이 꽃잎 몇 장 또 부풀어 오른다
그 순간 하늘이 캄캄해진다
무성한 꽃의 안도 이러할까
헤아려 보아도
일찍 시든 꽃잎은 옛 기억이 없고
뜨거운 뼛가루만 부서진다
희고 붉은 꽃잎들 봄볕을 탓하지만
한 장도 남김없이 다 피어야 끝나는
봄날, 마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꽃나무 아래가 무덤 속 같다


*시집,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문학의전당

 

 

 

 

 

 

사진기가 없던 일요일 오후 - 이운진


1
일요일 오후 수목원에는 꽃보다 사진기가 더 많다

패랭이 꽃 앞에서, 찰칵, 여자 아이가 찍혀 들어가고
천리향 앞에서, 하나 둘 셋, 연인 둘이 멀리까지 들어간다
개병풍 말채나무 노루오줌 마타리, 너푼너푼, 다 들어간다
그 뒤에 뒤에 뒤에 있는 털구름까지 뭉개져 들어간다

2
사진을 찍는 일은 스란치마의 주름처럼 기억 속에 긴 주름을 잡는 것
추억은 그 주름을 펼쳐 보는 것
잠깐 동안 마른 꽃향기를 맡는 것
돌도 바람도 물소리도 주름 잡힌다

3
주름을 건너가고 건너오는 사람들
다 밟지도 못할 층층계단 같은 주름을 만드는 일은 상처다
그 주름 속에 날짜를 숨기는 일은 눈물이다
주름이 맨발의 삶을 지고 있는 일은 빈 꽃자리 같은 흉터이다

4
주름 없는 하늘을 새가 지나간다
아이 둘을 업은 여자가 지나가고
검은 그림자가 끌려가고
사진기 대신 풀꽃을 든 남자가 툭툭 일요일 오후를 차며 간다



 

# 이운진 시인은 1971년 경남 거창 출생으로 동덕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5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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