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때 나는 적막했고 - 손수진

마루안 2018. 4. 20. 21:07



쓸쓸하고 한가로운 풍경 - 손수진



국도 1호선 가드레일 안쪽에
주인 없는 신발 한 짝
연보라색 오랑캐꽃과 놀고 있다


속도는 끝이 없는 법


낡아간다는 의식조차 없이 끌려다니다가
속도에서 비껴선 후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신발 한 짝
봄 햇살 아래 한가롭게 삭아지고 있다



*시집, 붉은 여우, 한국문연







봄동 - 손수진



어린 날 객지에서 만난 사내와
떠돌다가 뿌리내린 곳
성치 못한 아들 낳은 죄로
반건달인 사내에게조차
눈 한번 크게 뜨지 못하고
땅바닥에 붙어 빳빳하게
몸에 가시만 키우며
한겨울에도 새파랗게 독이 올라 있던 여자가
삼겹살에 소주 한 잔 들어가자
발그스름 눈가가 붉어지고
까실하던 혓바닥이 풀어지며
-성, 나라고 쓴맛만 있는 게 아니네
살다 보니 오늘처럼 달착지근한 맛이 있는 날도 있네


창밖에 풀풀 봄눈 내리고
나는 자꾸 창밖을 본다





# 짧은 시에 긴 여운을 담고 있는 시다. 어찌 시 한 편에 한 사람의 일생을 온전히 담을 수 있겠는가마는 회화적인 시에서 고단한 삶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왜 나는 이런 시에 오래 눈길이 가는 걸까. 봄날의 연두빛 창밖 풍경이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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