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벚꽃 족적 - 주영헌

마루안 2018. 4. 20. 21:27



벚꽃 족적 - 주영헌



언덕의 흰 산발은 어디론가 뛰어가는 중이다
고여 있는 봄날의 수면,
꽃잎의 수면 밑 얼굴들이 마르고 있고
깔깔대던 호흡들이 느릿느릿 걸어 나가고 있는 언덕의 봄 나무들
소란이 걸어 나간 어느 얼굴을 살피러
앞선 울음이 담장을 넘고 있다
슬픔에도 입구가 있어 문을 두드리면 우수수
겨울 꽃잎들이 쏟아질 것 같다


두 짝 걸음을 챙기지 못한 기별을 받고 나선 길
벚꽃은 사월의 눈처럼 휘날리고 있다
쉬 녹지 않던 곳마다 얼음은 두꺼워
졸졸 여윈 물소리를 장복(長服)으로 달고 살아왔는가
두 짝의 족적을 신고 오늘 아침 떠난 낙화가 움푹 파여 있다


싱싱한 슬픔은 외부에서 내부로 도착하고
받아든 손에 입김처럼 붙어 있는 꽃잎의 봉함(封緘)
따라나선 족적이 길인지도 모르고 걷고 있을 저쪽


겨울 쪽으로 몸을 기대고 있는 것들,
저 언덕의 산발에 바람이 다 빠져 나갈 때까지
봄날의 슬픔은 늘 내 것이 아닌 것에서 시작했으니
내 것이 아닌 마음으로 잊어주면 그뿐



*시집, 아이의 손톱을 깎아줄 때가 되었다, 문학의전당








화병(花病) - 주영헌



꽃은 잎이 지는 소리를 가장 먼 곳에서 듣는다


흰 눈으로 짧은 여름밤을 보낼 때, 뒤척이고 있는 구름의 소리를 듣는다
어느 마음은 그걸 또 공손히 받아 적는다


사각거리는 소리
찌르레기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 것일까요
제 몸의 어느 부위를 저리 갉아내고 있을까요
딱딱하게 굳어버린 슬픔을 강철 손톱으로 긁어내는 것처럼
울림은 수천 겹 밤을 찢고 있네요
극도의 속성에 저런 경쾌한 소리가 있었는지
굳이 색깔로 말하자면 푸른색의 病과 동색일까요


소리를 키우는 病의 색소


슬픔에 철심처럼 박힌 괘념(掛念)은 잠시 접어두고
色을 즐기거나 아니면 音을 즐기거나


기억에 매달려 크고 있는 病의 유통기간은 언제까지인지
철 지난 病은 그냥 툭, 하는 소리로 사라지는지
병의 경과를 진단하는 저 바람의 의술
꽃잎은 다음 계절로 휘날리고 있다
이때쯤 꽃은 가장 환하다


꽃잎은 마음에서 가장 먼 곳에서부터 말라 간다





# 위 두 시를 이 시집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내 맘대로 결정이다. 여러 번 읽어야 단물이 빠져나오는 시여서일까. 반복해서 읽어도 물리지 않는 시다. 분명 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계절 감각을 마비시키는 시간 개념이 몽환적이다. 나만 그런가? 대체 지금 지는 꽃은 지난 겨울을 회상하는 것인가 다음 겨울을 기다리는 것인가. 이래저래 어지러운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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