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이 그려준 자화상 - 안상학

마루안 2018. 4. 20. 20:53



꽃이 그려준 자화상 - 안상학



이 세상에서
네가 가장 예뻐하는 것이 네 전생이란다
그렇다고 손안에 넣지는 말아라
손안에 가두는 순간
후생에서는 그 아름다운 전생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다
가령, 꽃이라든지, 혹은 그 무엇이든지


지금 이 세상에서
네가 가장 미워하는 것이 네 후생이라면 끔찍하지 않니
후생에서 아름다운 전생을 두고두고 만나보려거든
제발 손안에 거두어 보듬어라
말하자면, 똥이라든지, 혹은 그 무엇이든지


모를 일 아니겠는가
꽃들의 세계에선 지금 네가 꽃일지, 미안하게도
꽃들이 킁킁대며 네 냄새를 맡고 있을지


하지만, 아마도 꽃들은 내가 다음 세상에는 없어서 나를 더 이상 못 그릴 것이라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을 것이다 꽃들이야말로 내가 못하는 뿌리내리기를 터득한 지 이미 오랜 화상 아니겠는가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실천문학사








앙숙 - 안상학



어느 신부님은
마당가에 꽃 키우는 것 못마땅해했다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있으면 콩이나 채소를 가꾸었다


어느 작가는
마당에 풀이 우북해도 절대 뽑지 않았다
쇠무릎 이질풀 삼백초 질경이까지 다 약으로 썼다


한 사람은 어려서 배가 고팠고
한 사람은 어려서 몸이 아팠다
둘은 평생 친구였다


그들과 친했던 어느 농민 운동가는
집을 자주 비우다 가끔 집에 돌아가면
아내가 가꾼 꽃밭 갈아엎어 텃밭 만들곤 했다
아내는 남편이 집을 비우면
기다렸다는 듯이 텃밭 갈아엎어 꽃밭 가꾸곤 했다


텃밭과 꽃밭의 숨바꼭질
아내가 남편을 잃고서야 끝이 났다
아내는 꽃밭에서 아주 살았다


한 사람은 농사를 사랑해서 채소를 길렀던 것이고
한 사람은 남편이 그리워서 꽃을 가꾸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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