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길을 걷다가 - 박석준

마루안 2018. 4. 19. 22:28

 

 

길을 걷다가 - 박석준


길을 걷다가
혼자일 때
단어들이 구르고
닳아져 버린 일상의 끝
저물 듯한 인생이 네 앞에 형상을 드리울 때

가거라
거리 색색의 사람들로 물들었을 때
사람 무섭지 않으니
어서 가거라

밤 깊어서
그림자로 눕고 싶은 방이 그리워지도록
사람 형상에 사무치면
가가라 어서
그 방에 가서
숨죽이고 귀 세우면서
잠들 때까지
사람 자취를 새겨 보아라

말 못할 그리움이
뇌리를 기웃거리고
말하고 싶은 말들만이
가슴을 파고들면
세월에 바람을 떨구는 밤은
사람 없는 고독에 시달리다가
홀로 죄를 짓더라도

다시 날이 새고 숨쉴 수만 있다면
세월은 그저 가는 것
사람이란 거리에 흔하게 구르면서
네 아픔 밀어낼 것이니

사람 없는 어두운 거리는
쫓기듯이 바쁘게 걸어
사람 그리워지는 네
고독의 방으로 어서 가거라


*시집, <거짓 시, 쇼윈도 세상에서>, 문학들



 



세월 후 4월 - 박석준


떠나겠어요.
꽃피는 4월에 만나서
공원길로 함께 거닐었죠.
풋사랑일망정 맺은 사랑,
조심스럽고 갈구하는 눈빛
초원 위의 나비, 파동치는 젊음의 빛이 아름다웠을 텐데

밤 12시가 되어 가는데. 곧 또 하루가 오고
진실도 아름다움도 구별하기 어렵게 그 4월이 옛 4월로 지나가
너무 혼돈스러워요.

떠나겠어요.
인터넷 속으로 사람들의 눈길 끄집을 만큼
이미 세상은 변해 버려서.
떠나는, 떠난 사람 앞에 서 있지 못한 건
인사가 아니지요.

출퇴근하는 것 말고는
홀로 어디를 가지 못하는 힘없는 시절이라 해도
해마다 여름이면 장마가 졌어요.
사람을 잃어간 밤들이
가슴에 남아 애수가 되었다 해도.

몰랐다가 어느 날들을 만나 시절이 한 번 흐르고,
알았다가 어느 한 날을 못 만나 지금의 새 시절은 힘이 없어요.
돈이 사람들 옆에 구르고, 아직 청춘이 돈 따라 흐르는 걸
보았지요. 그러곤 알았어요, 사람이 오지 않으면 떠난 것이라는 걸.

어느덧 50대 후반에 이르러
열여섯 살의 육체와 열아홉의 사색만이 의미처럼 남게 된 채
뇌리에 사람 몇 스치우다가
또 한 밤이 가고 있어요.
한 사람이 세월에 흘러가고 있어요.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이 그려준 자화상 - 안상학  (0) 2018.04.20
익숙한 길 - 조항록  (0) 2018.04.19
잊읍시다 - 고철  (0) 2018.04.19
지렁이만큼이나 외롭고 쓸쓸하게 - 최서림  (0) 2018.04.19
이유는 없다 - 임동확  (0) 2018.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