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익숙한 길 - 조항록

마루안 2018. 4. 19. 22:38



익숙한 길 - 조항록



후드득 벚꽃이 지는 아침
우르르 소나기 쏟아지는 저녁
하얗게 눈이 젖고
마음은 잠기네


환장할 일이
아직
그렇게 남아 있을까


현실을 오독하며
추억을 왜곡하며
내부순환만 거듭하는
묽은 피의 내력


어처구니없는 사랑이라도
기다리고 있을까
저 길 모퉁이를 몇 번 지나면



*조항록 시집, 근황, 서정시학








마흔 살 - 조항록



슬픔이 차오르던 자리에서
통증이 죽순처럼 자란다
못 박혔다 못을 떠나보낸 자리에서
벌건 독이 물결처럼 퍼져나간다
어느새 마음의 병이 몸의 병으로 전이되는구나
벌써 순한 담배를 찾느냐고
저녁마다 공원을 맴도느냐고
출출한데 당근이나 오이를 씹느냐고
웃으며 세월의 비겁함을 조롱하지 마라
누구의 비난도 자유지만
뒤늦게 옷을 벗는 한물간 여배우를 보아도
생명은 질기다
온몸으로 꿈틀거린다
몸밖에 없어 보이는 지렁이인 양
부득이 몸으로 밀고 가야 할 진창길이
아직 길게 남아 있다
마음이야 눈물도 알고 작별도 안다지만
일찍이 변절도 한다지만
몸은 현실 앞에서 그냥 속수무책이다
하여 몸이 두려워지는 까닭을 말해줄 수 있는 건
먼지의 바벨탑을 쌓는 침묵뿐이다





# 읽을수록 단물이 우러나는 좋은 시다.  시인이 거쳐온 마흔 살의 통증이 오롯이 전해 온다. 시집 첫장에 실린 시인의 말도 짧으면서 명료하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을 읽을 수 있듯이 그런 전형을 보여주는 글이다. 시인의 말을 옮긴다.


시는 차선이다, 사랑은 차선이다,
희망은 차선이다,
내게 있어 나는 차선(次善)이다.
최선을 믿지 않겠다고 작심했으므로,


그러니
나는 무거운가, 가벼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