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참 다른 일 - 김병호

마루안 2018. 4. 18. 20:40



참 다른 일 - 김병호

보송보송 잎눈 매단 목련 아래에서

한나절 서성거려 본 당신이라면 알 수 있을까


가지마다 낱낱의 불꽃을 매달고 서 있는

유순한 아픔과

적막하게 벗은 잔등에 혀를 대는

봄바람의 뜨거움을


찢겨진 마지막 페이지처럼 멈춘 오후 네 시

명치에 닿거나 바닥에 끌리는 슬픔 대신

뒤돌아서서 그저, 지나가기만을 눈감고 기다리다

그만, 울음을 놓쳐 본 당신이라면 알 수 있을까


먼 산 뒤로만 떨어지던 별똥별처럼 아찔한

사랑의 방식과

들판 한복판에 멈춰 버린 두 량짜리 기차처럼 막다른

이별의 자세를


그늘 아래에 의자 하나 가져다 놓고서

낮달이 질 때까지 꽃이 놓일 자리의 기색과

빈 가지에 걸린 구름의 양을 재어 본

당신이라면 알 수 있을까

그새 슬픔도 나의 슬픔이 아니고

아직 찬란도 나의 찬란이 아닌

그저 지워진 첫 줄 같은 눈동자를


이른 봄날 오후 한꺼번에 밀려왔던 모든 것을



*시집, 백핸드 발리, 문학수첩








아무의 잠깐 - 김병호



나무로, 새로, 왕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

바람이나 강물로도 살아갈 수 있을까


성에 낀 창문과 말갛게 씻긴 지붕과 우듬지의 빈 새집과 서쪽 지평선 위의 성좌가

반짝인다, 아주 잠깐


너는 내 옆에서 몸을 구부린 채 잠들어 있다

네게 이 별의 이름을 주지 않았을 때

네가 나의 운명에 속하지 않았을 때

너는 무엇이었을까


궁리를 하는 사이,

새벽이 다시 어두워진다


네가 뒤척일 때마다 바람과 얼음과 울음은

나의 몫이었으면

소금돌을 핥는 꿈에 시달리다 맞은 새벽도

다만 내 것이었으면


창밖으론 서리가 붐비고

긴 유랑에서 돌아와 앓는

몸 밖으로 잠깐씩 달이 자란다


아직 내게로 오지 못한 것들이 남았을까


순한 짐승의 뼈로 만든 피리

같은 울음이 밤을 흔든다

눈만 흰 새의 울음이다






# 김병호(金炳昊) 시인은 1971년 광주 출생으로 중앙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월간문학>,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달안을 걷다>, <밤새 이상(李箱)을 읽다>, <백핸드 발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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