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단자 봄꽃에게 - 이재섭

마루안 2018. 4. 18. 20:11



이단자 봄꽃에게 - 이재섭



지난 가을,
너의 오그라진 뿌리를 보았는데
그리 꺼진 몸을 가지고
기어코 한겨울을 났는가 보다.
하루하루 삭아가는 그 몸뚱이로도
너는 감히 딴 생각을 하며
명주실 같이 질긴 생명을
자근자근 짜고 있었나보다.


어둡고 황량한 땅에 떨어져
몸을 더럽히고 밟혀 살면서도
봄을 기다려 꽃 피우기를 포기하지 않는 너는
셈 밝은 이 세상에 얼마나 얄미운 오리새끼냐
바람에 추위에 고개 숙이지 않고
흙에 묻혀서도 감히 딴 생각을 품는 너는
얼마나 큰 위험인물이냐.


깨어 일어나고 싶은
작은 욕망마저 꾸짖으며
뜨거운 침묵으로 언 대지를 녹여
문드러진 몸에 남은 생살 한 점까지도 다 내어놓더니


어느 날,
아무도 멸시 못할 아름다운 모습으로
무미한 이 세상울 비웃고 있구나.
숨 막히게 환한 미소로
이 세상을 흔들고 있구나.



*이재섭 시집, 석탄, 시담포엠








석탄 - 이재섭



내 몸 속에는 발화점이 있다.
죽은 것들의 사체에 몰려온 세상의 모든 음기가 응축된
함몰의 최후 거점.
탄화된 몸 어느 위치인가에 그 핵이 있다.


음습한 기운의 농축일 뿐인데
세상 잇속 밝은 사내의 곡괭이에 찍혀 파르르 떨고 나면
피부는 방금 그물에 포획된 고등어 비늘처럼 민감해진다.
내 몸 어디에 외계의 불씨를 간절히 기다리는 발화점이 있다.


나는 스스로 타오르지 못한다.
뜨거운 양기가 내 몸의 깊은 지점에 닿을 때에야
몸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타오른다.
비 자발성 오르가즘, 피학대증후군.


어떤 사내가 내 몸 깊이 곡괭이를 대 줄 것인가.
누가 내 숙명의 발화점까지 거침없이 다가올 것인가.
세상의 음기로 탄화된 몸이 남김없이 타올라
하얀 연기로 풀어질 그날을 기다린다.





# 우연히 눈에 들어온 시집이다. 환갑의 나이에 첫 시집을 냈다. 10대에 품었던 문학에 대한 오랜 열망을 가슴에 담고 살다가 뒤늦게 시집을 낸 것이다. 50 년간 가슴에 품고 살았던 문학병의 발화를 낭중지추라는 사자성어에 빗대본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늦게 터진 시혼이 석탄처럼 활활 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