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무줄 매기 - 이용호

마루안 2018. 4. 15. 19:22



고무줄 매기 - 이용호



창문 밖에 초생달이 뜨면 어머니는 말씀하셨지
애야, 고무줄만 갈면 꽤 오래 입을 수 있겠구나
이렇게 질긴 육신은 나도 처음 본단다
어머니는 휴지처럼 늘어진 속옷의 윗부분을 서둘러 감추시다 힘없이 중얼거리셨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등 뒤 같은 윗목으로 억센 바람이 분다
질긴 건 고무줄이 아닌데.....,
아버지의 혈액을 타고 흘러오던 그 질긴 유전遺傳의 순례
나는 강아지 새끼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아 잠을 청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질긴 건 고무줄이 아닌데....,
나는 내 생애의 탄력을 믿고 잘 마른 영혼의 돛배 한 척을 밀어다 놓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무줄을 하나 샀다
무엇이 그렇게도 급한지 원점으로 돌아가는 지친 그리움들
하나 지금은 내 손에 들려져 있다
팽팽하게 잡아당겨 끊어질 때까지
손이 시려올 때까지
어차피 아픔은 살아 있는 자의 짐
나는 천천히 고무줄을 잡아당기다
어머니의 멍든 눈망울을 생각한다
너무 쉽게 살았다고 자책하시던
아버지의 복권 두 장을 증오한다


다시 한 번만 돌아갈 수 있다면
재만 남기는 미련한 장작불의 기억처럼
그렇게 갈 수만 있다면
추억에 가려 난 더 이상 불을 지피지 못해
아아, 네가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습한 이끼가 피어나는 곳
자질구레한 믿음들과 아득히 날아가던 희망들이 새파란 귀향 본능으로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가는 곳
가거라.



*시집, 내 안에 타오르던 그대의 한 생애, 현대시학








자산어보 - 이용호



아우는 무사히 섬을 건너갔을까?


꿈속에서 아우의 얼굴을 본다 형님 하며 손을 잡는데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흉터가 십자가처럼 팔목에 새겨져 있었다 나주 율정점에서의 이별이 어제처럼 아팠다 기어서 뱃전에 나가보면 온통 검은 산바위, 안개에 싸인 채 봉우리 하나로 떠 있는 섬, 송장처럼 배 밑바닥에 누워 바다를 건넜다 이곳에선 비린 걸 먹지 못하면 살 수 없다고 어부는 바다를 보며 껄껄 웃었지만, 밀려오는 멀미에 속이 온통 뒤집어졌다. 안에 있는 걸 모두 게워내야 살 수 있다고 어부가 말했다


여인들은 바다로 솟구쳤다 사라졌다 태왁* 밑으로 흑산이 잠겨 있었다 여인들의 몇몇은 속병으로 죽어가고 바다로 떠나간 그들의 지아비들은 혼백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절도안치, 사리沙里에서 멀리 홍어 우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는 듯, 밤바다에서 밀려오는 갯내음에 무릎이 쑤셔왔다 어부가 가져다준 홍어 한 점에 탁주 한 사발을 들이켰다 노모의 무릎에서 이 지상으로 내려왔듯, 또 하나의 슬하기 지고 있었다


고래의 배를 가르고 뼈마디의 수를 세었다 내장을 꺼내 태반을 살펴보다 따가운 햇살에 토악질을 해댔다 먹물이 마르자 허기가 밀려왔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처럼 무거웠다 책을 덮고 일어서면 반가운 후회가 발을 내딛는 곳마다 널려 있었다 붓을 굴리고 벼루를 이리저리 뒤집어보다가 오래된 고서처럼 방구석에서 울었다


해풍이 스스로 옷고름을 풀며 지나갔다 여인들이 물질하며 부르는 노랫가락을 나도 모르게 흥얼대본다 혼자서도 그녀들의 노래를 부를 줄 알면 이제 섬을 떠날 때가 됐다고...., 그러나 소식은 언제나 멀리 있었다 오늘도 포구에 나가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복성재**에서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만 청아하게 울려왔다.



*태왁: 해녀가 물질할 때 쓰는 부유도구
**복성재: 정약전이 아이들을 가르쳤던 서당





# 요즘 고무줄이 필요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난했지만 사람 냄새가 나던 그러나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어릴 적 추억이 밀려오는 시다. <질긴 건 고무줄이 아닌데... 나는 내 생애의 탄력을 믿고 잘 마른 영혼의 돛배 한 척을 밀어다 놓는다. 자질구레한 믿음들과 아늑히 날아가던 희망들이 새파란 귀향 본능으로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가는 곳>. 밑줄을 긋고 싶은 구절이다. 이렇게 마음을 움직여야 좋은 시다. 자산어보 또한 산문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주 읽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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