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무릉도원을 떠나왔다 - 이종성

마루안 2018. 4. 14. 22:27



나는 무릉도원을 떠나왔다 - 이종성



멀리 떠나서,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아지랑이 같은
그 무언가 겨우 꽃피려 하니 이제야 알겠다.
낭창한 마흔 줄의 가지 끝에 앉아 자꾸만 멀리 바라보는 곳


앞뜰에 매화가 눈발로 날리자 바깥마당 살구꽃이
낙엽송 오솔길로 난 재빼기까지 가득 길을 메운다.
항상 먼저 피는 윗배나무 흰 이를 드러내고 웃을라치면
막내 여동생을 닮은 뒤란의 앵두꽃은 수줍어 벌써 볼이 붉다.
언제나 할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고래실 논배미를 덮은 늠연한 거목의 탱자나무
한 올 향기가 번지기 무섭게 달려드는 벌떼들
이 세상의 날개를 가진 것들은 모두가 와 있다.
아쟁 소리를 내는 벌떼들은 점점 바깥으로 멀어지고
이미 울타리를 넘어 번지는 골담초와 복사꽃
앞산 뒷산 먼 산 가득 소리 없이 폭발하는 꽃들
포연이 자욱하다.


이제 열매가 익기까지 공복이 기다린다.
마지막 허기를 채워주던 감꽃 주워 먹다
지워지지 않는 물이 든 내 유년의 그곳


노래 부를 때마다
눈물 한 방울로도 내 생의 온 마디를 연주하는
그 고향의 봄노래, 내가 떠나온 무릉도원이다.
하나의 나무가 되어 아직도 돌아가지 못한
그 악보 속 음표로 선 꽃나무마다 아쟁 소리와 함께
꽃잎들 하늘거리다 어깨 위에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내린다.



*시집, 바람은 항상 출구를 찾는다, 한국문연








가출, 그 돌아가지 못한 봄날 - 이종성



산벚꽃이 각시의 볼처럼 참 곱다.
시리도록 찬, 꽃그늘을 흐르는 산골 물소리
첩첩 둘러 노란 죽단화 앉은 물가에 겹겹이 피었다.


내가 그 산골 한 잎의 벚꽃이 되어 떠나오던 봄이 있었다.
꾀꼬리 울음소리 낭창한 봄날
가지 끝에 올려놓고 어지럽게 흔들던
신열 뜨겁던 봄날이 있었다.
내가 대문을 나서 바깥마당을 급히 가로지르자
그 황금조(黃金鳥)는 제 날개를 치며 목이 아프게
새된 소리로 뭐라고 하였지만
나는 그때 귀가 먹었으므로 아무 것도 듣지를 못했다.


떠나온 그 이상향의 도시는 참으로 이상하였다.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언제나
내가 앉을 수 있는 곳은 고압의 전선뿐이었다.
나에게는 한 마리 참새로 집을 지을 수 있는 초가지붕도
그 작은 둥지 하나 만들 방울새의 시누대숲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집을 부수고, 집을 짓느라 어깻죽지 한번
펼 수 있는 그 산골 숲 벚나무 한 가지도 없었다.
꿈 없는 밤을 마른기침으로 새우는 날이 많았다.


내가 겨우 내 집을 짓게 된 날이 멀지 않다.
잠자리에 누우면서야 나는 비로소 내 몸이 퇴화된 것을 알았다.
겨드랑이 어느 구석에도 날개의 흔적이 없다.
천방지축으로 하늘을 날았던 날도 기억 속에서 희미하였다.


간밤에 다시 꿈을 꾸었다.
산벚꽃 각시볼처럼 곱게 핀 그곳, 아직도 시린 산골 물소리
첩첩 둘러 겹겹의 노란 매화가 피는 곳
나 거기 서 있었다
몰래 내다 팔 쌀자루 어깨에 둘러맨 채.


어머니 지금도 회초리 들고 계실까?





# 이종성 시인은 199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공간시낭독회 상임시인이고 수주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 그곳엔 갓길이 없다>, <바람은 항상 출구를 찾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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