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의 화엄 - 박철

마루안 2018. 4. 14. 22:11



너의 화엄 - 박철



화엄을 읽었다


한 시절 매달린 경(經)의 끝이
잊으라,였을 때
억울해 너에게 편지를 쓴다


삼년간 벗이었던 화정공원의 물푸레나무
그마저 옹두리 만들며 스스로 물러서니
구청 직원은 곧 베어버리겠다고 말한다 또
잊으라는 것이다
산 위에 오르면 장엄하던 눈 아래 세계도
골목길에 들어서 쉽게 잊혀지고
그게 모두 내 허물인 듯
내일은 일없이 이종사촌이나 찾아가봐야겠다


사랑도 나무도 읽지 말고 담아야 할 것을
한 시절 바라보다
화엄을 잃었다



*시집,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 창비








빛에 대하여 - 박철



봄빛은 지극한데
하얀 창가에 국밥집 아이와 매미가 밀담 중이다
아이가 며칠 울더니 오늘은 우는 애미를 달래고 있다
아이가 저리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사랑도 노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나는 일생을 노동자로 살아온 살아온 셈이다
내가 사랑을 하였다는 얘기가 아니라
거친 내 일생이 왜 사랑해야 하는가를 떠들고 있었다
버드나무도 봄빛을 배워 기운이 푸릇한 정이월
명창정궤란 보이는 정갈함만 이르는 게 아니라
거기 백자 같은 여지와 빛의 범람을 말하는 것일 텐데
오늘 아이의 저 스미는 사랑도 그렇게 부르고 싶다
빛은 제 눈이 없어 가리는 곳이 없구나
내가 받은 축복의 전부는 어떤 고난 속에서도
비좁은 밥집 안에도 봄빛은 내린다는 사실이었다
얘야 신비롭지 않니 신비롭구나
그런 신비로움엔 기다림 외에 가는 길이 따로 없다
오래전 탯줄 타고 이미 당도해 있을지도 모를
내가 아무리 작아도 줄어들지 않는
또 거기 애틋한 분재 하나 몸 비틀고 있어도 좋으리
아이야
어느 누추한 담장 아래라도 화(華)해야 한다
맑기만 해도 안되고 충만하기만 해서도 안된다
맑고 가득하고 따뜻해야 한다


오늘은 춘이월 집으로 오는 길엔
골목 끝에서 아직 거칠게 싸움들이었다
먼지가 일고 헛발질에 입간판이 흔들렸다
말하자면 그들도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좀처럼 가지 않는 겨울과
안달이 난 봄이 되어 뒹굴고 있는 아,
어디에나 있는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