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은 무얼 보고 있을까? - 이경교

마루안 2018. 4. 14. 21:57



꽃은 무얼 보고 있을까? - 이경교



꽃그늘 아래로 꽃비 내린다 어두운 자리가 한꺼번에 환해진다


바닥에 누워 저 떠나온 가지를 올려다보는 꽃의 눈시울이 벌겋다


모든 이별의 빛깔은 저처럼 붉은빛이다


눈망울 속엔 허공의 구름 몇 조각 흘러간다 누가 누구를 보는 걸까


꽃의 초점이 자꾸 흐릿해진다 허공에서 누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눈이 침침하여 누군지 알 수 없다, 지금 바닥에 누워 있는 건 누구인가


꽃이었던 한 시절이 내게도 있었는지


나를 떠나 보낸 가지들만 어깨를 들썩인다



*시집, 목련을 읽는 순서, 문학의전당








매화, 몇 세기를 흘러온 물소리 - 이경교



내가 후백제 시대를 살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늘, 섬진강변 매화꽃잎 떨어진다
꽃잎은 소리가 없다 그 무렵, 손끝 매서운 화공이 꽃잎의 소리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 기록이 낯설지 않다


꽃피는 시절은 지나갔다 나무들은 무덤마냥 잠잠해졌다 모든 게 무음(無音)이 되자, 내 잠도 끝났다


꽃잎 속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무음의 속잎을 가만 열어보면 젖어 있다, 화공이 누구였는지 이제 분명해졌다






# 이경교 시인은 1958년 충남 서산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응평전>, <꽃이 피는 이유>, <달의 뼈>, <수상하다, 모퉁이>, <모래의 시> 등이 있다. 현재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