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벚꽃잎처럼 - 이선영

마루안 2018. 4. 14. 21:41



벚꽃잎처럼 - 이선영



봄 벚꽃 아래서
비슷한 머리 모양에 비슷한 옷가지를 걸치고 오종종한 가방을 든 노인네들이
관광버스라도 기다리는지 옹송옹송 모여 서 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가끔씩 다른 이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구겨진 옷깃을 등뒤에서 펴주기도 하며
몇십년 젊었던 시절의 넘치던 욕심과 미움과 노여움이
이제는 다같이 늙어버린 육신 끼리끼리의 어울림 속에서
벚꽃잎처럼 가볍게 흩날려 가는가보다


보름 가까이 죽은 듯 누워 사경을 헤맨 시아버님,
깨어난 뒤 얼굴 보고
그냥 우신다
마음 굳게 먹으세요, 한마디가
무슨 소용이 되랴
그냥 놀란 거다
그냥 서러운 거다
그냥 겁나는 거다


노인네들은 몇자 갖춘 말보다 제대로 표현할 줄 안다
한소절 울음 앞에
벚꽃잎처럼 후르르
말이 무너진다



*시집,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창비








목련꽃 지는 까닭 - 이선영



목련은 꽃샘바람 견뎌가며 저 뿌리 끝에서부터 아름다운 노래를 피워올렸다


꽃봉오리가 한껏 벌어지던 어느날 그 아래를 지나던 인간의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떨기 노래를 피우는 악기였을 때 목련은 자신에게 두 다리가 없음을 불행해하지 않았었다


느닷없는 사랑은 기어이 그녀의 몸에서 흡반 같은 두 다리를 돋아나게 했고


인간의 남자를 닮은 두 다리는 목련에게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걸을 때마다 애써 감춰야 하는 고통은 왜인가


두 다리를 얻는 대신 목련은 그의 노래를 잃었다


두 다리만 덩그마니 매달린 벙어리 목련은 더이상 목련이 아니었다


그 손에 꽃잎이 낱낱이 찢겨나가는, 사랑


세상 모든 암꽃들이 그들의 수꽃과 함께 잠든 새벽


자신의 사랑을 찌르지 못한


목련은 거추장스러운 두 다리를 벗어던지고


수만 개의 공기방울이 되어 대기중으로 흩어져갔다


꽃샘바람 채 가시기도 전인 4월의 하룻밤 새 자고 일어나 거리에 나서보니


목련꽃잎이 세상을 온통 무너뜨렸다


커다랗고 흰 눈물방울들이 공중에서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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