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흰 노루귀꽃, 이미 나도 흘러왔으니 - 박남준

마루안 2018. 4. 13. 22:25



흰 노루귀꽃, 이미 나도 흘러왔으니 - 박남준



이제 뜰 앞의 산과 강 모든 들판은 꽃들의 세상
묵묵히 지난 시간의 겨울을 견뎌온 것들이
일제히 광장의 깃발처럼 지상에 나부낀다
얼굴을 맞대고 내걸린다


한 꽃이 피고 지고 그 꽃이 진 자리에 다음 생의 어린 꿈이 자라고 있다
한 꽃이 피고 지고 그 꽃이 진 자리 들여다보게 된 시간까지를 흘러오는 동안
내 정신의 안과 밖
끊임없는 새들이 둥지에서 태어나고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동안 내 귀밑머리도 하얗게 흘러왔으리니
이미 나도 흘러왔으니


꽃이 질 무렵 올라오는 노루귀 새 잎새
흰 솜털 보송보송한 모습 꼭 노루귀를 닮았다
나도 이렇게 솜털 보송거리던 나이가 있었으리
그렇듯 나 이제 검은 머리 새하얀 불귀의 시간
잊어야 할 일들이 많다 노여움은 자주 오고
살아 있는 일이 한갓 덧없는 꿈같다
봄날, 내 곱고 붉은 사랑들은 일장춘몽이런가
언제였던가 그런 날이 있기나 했던가
까마득하다 가물거린다 아득한 어제다


한때 한 포기의 풀이라면 그 풀의 극점, 꽃처럼 살고자 했으나
줄기라면 잎새라면 아니 땅속 뿌리라면 또한 어떠리
모든 것들의 순간순간 저마다 극에 이르지 않은 것들
어디 없으리 꽃 피우고자 했으나 새순이 뽑힌들,
어린 봉오리로서 세상을 다한들 그들의 한때
아름답고 꼿꼿하지 않은 날들 어찌 없었으리


무수한 날들이다 그 안에 아직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 너 무엇에 사로잡혀 있느냐
흰 노루귀꽃 한 송이가 봄날의 하늘을 건너고 있다
흰 노루귀꽃 한 송이가 흘러가고 있다
 


*박남준 시집, 적막, 창작과비평








동백 - 동백



동백의 숲까지 나는 간다
저 붉은 것,
피를 토하며 매달리는 간절한 고통 같은 것
어떤 격렬한 열망이 이 겨울 꽃을 피우게 하는지
내 욕망의 그늘에도 동백이 숨어 피고 지고 있겠지


지는 것들이 길 위에 누워 꽃길을 만드는구나
동백의 숲에서는 꽃의 무상함도 다만 일별해야 했으나
견딜 수 없는 몸의 무게로 무너져내린 동백을 보는 일이란
곤두박질한 주검의 속살을 기웃거리는 일 같아서
두 눈은 동백 너머 푸른 바다 더듬이를 곤두세운다
옛날은 이렇게도 끈질기구나
동백을 보러 갔던 건
거기 내 안의 동백을 부리고자 했던 것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떨어지네
무수한 칼날을 들어 동백의 가지를 치고 또 친들
나를 아예 죽고 죽이지 않은들
저 동백 다시 피어나지 않겠는가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피어나네






# 시인의 외로움과 슬픔이 제대로 감지되는 시다. 나는 왜 이 두 시에서 죽음을 떠올렸을까. 많은 은유가 함유되어 있긴 하지만 한순간 모가지가 뚝 꺾여 떨어지는 동백처럼 시인도 몸을 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그 실패 뒤에 새순처럼 솟아오르는 살고자 하는 간절한 희망, 이처럼 꽃지는 이 봄은 서럽도록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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