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장난 운명 - 박세현

마루안 2018. 4. 13. 22:10



고장난 운명 - 박세현



7번 국도를 따라가다
자판기에서 커피 뽑아먹듯이 장난 삼아
38휴게소 구석에 서 있는 컴퓨터 운세기에
점잖게 지폐 한 장을 밀어넣었다
그러나 그런데
그날 컴퓨터에선 에러 메시지만 흘러나왔더라


점원이 다가와 프로그램이 고장났음을 선언했어도
쉽게 믿을 수 없었고
안 믿을 수도 없었더라


고장난 운명?
그런 것은 어데 가서 아프터 서비스를 받나


해군 초계정이 갈라놓은 파도더미 속에서
나는 보았으리라


포말 속에 번쩍이던
운명의 스냅 같은 거



*박세현 시집, 치악산, 문학과지성








봄날 - 박세현



봄은 수락산쯤 상계동 어디쯤 와서
노원전철역 부근에서 어정대며 뭐라고 중얼대는가
들어보자니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가 아니던가


아내가 출근한 빈방에 에프엠씩이나 틀어놓고
설탕 뺀 커피 한 잔 걸치고 창턱에 기대면
베란다를 기어오르는 봄날의 키 작은 환상들
나는 절망의 기둥서방이 되어 휘파람을 불어본다


라디오에서 영글어진 바이올린 선율이
관리소 앞 잔디밭까지 굴러가 모차르트 비슷하니 닮은
늙은 경비원을 꼬셔대고 있다
아침 열시임에도 속살이 비치는 잠옷 바람으로 돌아치는
봄날의 관능에 가스총으로 무장한 경비원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구나
한 생애의 옆구리는 저렇게 터져나가는 것인가
눈물겨운 지상전!


나는 어서 늙어가자
그리하면 골 깊은 주름 위로 봄은 선선히 지나가거라
세월처럼 지나가라
두번 다시 헐거운 틀니로 그대 허벅지를 깨물지 않으리라
수락산쯤 와가지고 나를 뒤집는 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