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일흔 살의 인터뷰 - 천양희

마루안 2018. 4. 12. 22:50



일흔 살의 인터뷰 - 천양희



나는 오늘 늦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세월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고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었냐고
입술에 바다를 물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내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노을이며 파도며
다른 무엇인가 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늘 실패했거든요
정열의 상실은 주름살을 늘리고
서쪽은 노을로 물들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았냐고
해송을 붙들고 그가 물었을 때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내일에 속는 것보다
세월에 속는 것이 나았거든요
꽃을 보고 슬픔을 극복하겠다고
기울어지는 해를 붙잡았습니다
당신은 어느 때 우느냐고
파도를 밀치며 그가 물었을 때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했을 때 운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보일까 말까 한 작은 간이역이 행복이었거든요


일흔 살의 인터뷰를 마치며
마흔 살의 그가 말했습니다
떨어진 꽃잎 앞에서도 배워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고
참 좋은 인터뷰였다고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 문학과지성








구별되지 않는 일들 - 천양희



쑥부쟁이와 구절초와 벌개미취가 잘 구별되지 않고
나팔꽃과 메꽃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은사시나무와 자작나무가 잘 구별되지 않고
미모사와 신경초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안개와 는개가 잘 구별되지 않고
이슬비와 가랑비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가리와 두루미가 잘 구별되지 않고
개와 늑대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적당히 사는 것과 대충 사는 것이 잘 구별되지 않고
잡념 없는 사람과 잡음 없는 사람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평생 바라본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왜 그럴까
구별 없는 하늘에 물었습니다
구별되지 않는 것은 쓴맛의 깊이를 모른다는 것이지
빗방울 하나가 내 이마에
대답처럼 떨어졌습니다





# 평생 시인으로 사슴처럼 산 노시인의 인생 회고담이 아름답게 전해온다. 노시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소녀 같은 심성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막무가내로 흘러간 세월을 어쩌겠는가. 이렇게 늙을 수 있다면 나이 먹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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