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낙원의 애수 - 박후기

마루안 2018. 4. 12. 22:35



낙원의 애수 - 박후기



낙원상가 할렐루야 악기점

중고 기타 서글프게 흐느낀다


울어라, 기타줄

낙원에 매인 몸이여!


기타처럼,

오래 묵은 사랑일수록


팽팽하게 긴장을 당겨야

제소리를 내는구나, 사람아


불안한 음계가

건반 같은 계단을 밟고 내려갈 때,


바람은

부드럽게 가로수를 불어대고

사분음표로 매달린 플라터너스 방울들

엇박자로 흔들린다


나는 리코더의 구멍만큼이나

많은 구멍을 가졌지만,

한때 당신은

열 손가락으로

내 몸의 구멍을 막아주었다


그리고

그 중 한 개의 구멍을 열어

한 호흡으로

나를 소리나게 하였다, 사람아



*시집,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실천문학사








목련 - 박후기



한 사내가 진다

네거티브 필름 속   

시들어가는 폐 한쪽이 목화 이불솜 같던

창백한 사내의 낯이 툭, 길 위에 떨어진다

알전구 같은

백목련 꽃봉오리에 내려앉은 햇살이

필라멘트처럼 떨고 있다 

필름 속 세상은 깊고도 어두워

오히려 상처가 환하게 빛난다 

부서진 문짝이 바람에 넘어가듯 

와락, 꽃의 시공(時空)이 열리고,

사내의 꿈은 오래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목련은 너무 일찍 화촉을 끈다 

속절없이 사그라지는 가여운 향기     

지상에 남겨진 사내의 여자가

타들어간 향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고뇌 속을 가다*가 관 속에서 펼쳐지고   

들린 관짝에 매달린

사내의 늙은 아버지가 소처럼 울먹인다


벽제 시립 화장터

막 이승을 지나온 장의차가 저승 문턱에 걸려

덜커덕, 시동 꺼지는 소리 들린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화구 속에 죽은 사내 혼자 남겨 두고

천천히 그러나 재빨리 국수 한 그릇 말아 먹고

죽은 사내 생각하며 이 쑤실 때,

바람을 걸쳐 입은 촛불처럼   

누군가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린다

저 불타버린 성냥골처럼 가느다란 뼈는 아마도

사내의 따뜻한 심장을 감싸주었던 늑골이었을까 

뼛가루 한 줌씩 움켜 쥔 채

사람들 흩어지고   

사내도 흩어진다

살아남은 자들은 개미처럼 줄지어

해마다 학사주점 왕개미집으로 2차 가고

개미처럼 뒤돌아보며 다시 흩어지고

내년에 다시 보자고,

잘 가, 외마디 소리에 

뉘 집 목련이 떨어진다 



*알랙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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