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 싫다 - 이규리

마루안 2018. 4. 11. 20:52

 

 

봄, 싫다 - 이규리


백골 단청, 하얀 절 한 채
지금 막 무너지고 있다
그걸 받아 안는 한낮
무너져도 소리가 없다 저걸
누가 고요라 했겠다
언제 왔다 갔는지 만개한 벚나무 아래
신발 한 켤레

봄마다 땅속으로 마약을 주사하는지
이맘때, 거품 물고 사지를 틀다
몸서리 잦아드는
마흔 노총각이 있지
깜빡 까무러진 대낮이 있지
백약이 무효한 청춘 덤불처럼 걷어내고
이내 어깨를 허문 잠,
누가 고요라 했겠다

더 이상 속지 말자
해놓고 속는 게
꽃 탓이라 하겠나 약 탓이라 하겠나
너무 가까워서 안 보이는 것도 있지
취하게 하는 건 향이 아니라
취하고 싶은 제 뜻일 텐데

그래, 나무가 언제 꽃 피웠나?


*시집, 뒷모습, 랜덤하우스

 

 

 

 

 

 

날개, 무겁다 - 이규리


어젯밤, 창에 날개를 부딪고 죽은 나비
휴지로 곱게 싸놓았는데
아침에 보니 없어졌다

어떤 힘이 다시 날개를 달아주었는지
나비 날개에 묻은 은가루 금가루 털며
막장 같은 세상 어디에
자신을 운구했을까

날으는 거리가 곧 떨어질 자리라고,
가볍다 믿었던 날개가
추락한 뒤에 보면 가장 무거운데
믿었던 것이 눈부신 허방이었는지

나비 날개에 눈멀어 내일을 잊은 건
바로 나의 이야기
유리창 너머 나비가 나를 보아왔다면
풀썩이는 내 모습이 주검 같지 않았을까

가묘가 된 거푸집 하나 들쳐 메고
흰 나비 한 마리 어디론가 갔다
창 너머 한 사람도 따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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