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걸어 다니는 중년 - 문신

마루안 2018. 4. 11. 19:21



걸어 다니는 중년 - 문신



각각의 중년들이 걸어 다닌다
하얀 셔츠에 더러 넥타이를 매고 걸어 다닌다
갈색이 섞인 검은 구두 떼가 걸어 다닌다
손바닥을 펴고 아주 잠깐 바지주머니에 주먹을 찔러 넣은 손도 걸어 다닌다


어디 먼 데를 가는 것도 아니다
먼지 앉은 유리창 고층 빌딩 아래 넓은 이마들이 걸어 다닌다


금테와 뿔테가 섞인 흐린 눈빛들이 걸어 다닌다
걷는 이유를 알기나 할까 싶지만 정오가 되면 별별 중년들이 우선 걷기부터 한다


식당 식당 식당 식당 식당


전당대회에 몰려가는 야당과 여당의 중진들처럼
한 끼 밥을 찾아 허기진 뱃살들이 걸어 다닌다
굶고는 걸을 수 없다는 결연한 각오들도 몇몇 걸어 다닌다
아무도 고독하지 않으므로 여럿의 중년들은 걸어 다닌다


이 모든 도시 산책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점심 이후 칫솔질을 하고 나면 꼭꼭 잇몸에서 거품이 인다


잇몸질환을 앓는 중년들이 거품처럼 걸어 다닌다
제식훈련 중인 훈련병들처럼
칠월의 가로수가 제자리걸음이라도 걷고 싶은 표정이다



*문신 시집, 곁을 주는 일, 모악








회복기 - 문신



이르게 대자리를 꺼내 거년(去年) 봄에 누웠던 자리에 다시 몸을 뉜다 어느덧 대자리보다 먼저 삭고 푸석거릴 나이가 되었다 이렇게 몇 해나 봄마중 할 것인가 헤아려보니 대자리 펴놓은 산수유 그늘이 농(膿)처럼 어지럽다 헛것들이 부쩍 가까워졌다 병증에 병증이 덧나 생업 복귀는 또 한 해를 미루어놓았다


건너편 양지에는 홍매가 터졌는데


봄이 오는 것만큼 대책 없는 사태가 또 있을까


꽃그늘의 소란을 견디는 일과 새로 한 해를 살아낼 세간의 규모를 가늠하지 못한다


그래도 부지런한 사람들은


호미처럼 등이 굽어 비탈길에 엎드려 있다





# 문신 시인은 1973년 전남 여수 출생으로 전주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전북대 대학원 어문교육학과에서 문학교육을 공부해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됐다. 안주하지 않고 항상 공부하는 시인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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