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 핀 무덤 - 정일남

마루안 2018. 4. 9. 21:57



꽃 핀 무덤 - 정일남



죽음이란 멀리 갔다가 적적하면 돌아와 할미꽃 피는 것
어린 것을 늙었다고 하는 것은 봄에 대한 실례다


그대 이름이 달래였는데 빗돌에 새겨져 나를 본다
달래란 이름을 내가 얻어서
옷가슴에 넣고 다녔으나 이젠
장방형 토실에 임대한 방을 얻어 살림 잘살겠다


낮달의 바퀴는 굴러서
서역으로 골고다로 순례길을 가는 것인데
음각으로 새겨진 그대 이름을 입속에 넣으니 경단 같다
나는 빗돌을 빗돌이라 부를 수 없고
그대도 빗돌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대를 아는 사람 나밖에 없고
나를 아는 사람도 그대밖에 없으니
스쳐간 밀월의 신혼 열차는
돌아올 수 없는 국경을 건너갔다


봉분 위에 꽃 하나
어디서 지친 나비가 와서
입술이 부르트게 빨다 간다



*시집, 봄들에서, 푸른사상








역전 주점 - 정일남



정육점에 매달린 노을이 흥청망청 팔려 나간다
돼지비계 몇 점 놓고 억압과 자유를 아프도록 씹을 수 있는 술집
노역으로 땀을 팔아 살아보니
생은 질기고 안주는 짜다


기차는 밤 아홉 시에 막차가 청량리로 떠난다
거기 가면 청량한 사창가가 많았지


우린 고향 밀밭을 잊어버린 지가 오래되었어
종달새가 하늘을 보라고 얼마나 다그쳤었나
목돈 잡지 못하고 석탄의 전성기는 오래전에 끝났다
술잔 속에 청춘이 익사한 지 오래다
경상도 친구여, 자넨 반월공단으로 간다고 했나
나는 이 산골에 물러앉아 사슴이나 키워보려 하네
알코올 속에 녹아도 나는 자책의 깨달음은 없었지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아버지도 술주정뱅이 광부라 했어


깡패와 주먹이 주변을 애워싼다
나는 떨어져 뒹굴 생각을 먼저 했다
주먹 한 방에 코피가 쏟아지겠지
웃자, 명자라는 여자
명자꽃이 피는 봄날에





# 산전수전 다 겪은 노 시인의 세상 보는 눈길이 쓸쓸하면서도 따뜻하다. 열 번째 시집이라는데 이제야 만났다. 뒤늦게 주목해서 읽고 있는 시인이다. 시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는 시인의 말을 옮긴다.


*시인의 말


객지는 향수와 한패가 되어 싸고돌았다.
내 삶은 고운 무늬를 이루지 못했다.
고향 밀밭을 잊은 지 오래다.
허기지면 시를 주워 먹었다.
생은 이렇게 질기다.
열 번째 시집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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