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한 생애가 적막해서 - 허형만

마루안 2018. 4. 9. 22:47



한 생애가 적막해서 - 허형만



빗소리가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내 팔을 끄집어다가 팔베개하고 눕는다
숲에서 방방 뛰어놀았는지
초록 내음이 콧속에서 진동한다
이파리 초록 물 떨구는 소리
풀벌레 호르르 날갯짓 소리
소리가 소리에게 서로 안부라도 묻는 듯
밤새 가슴으로 파고드는
빗소리가 가창오리 떼처럼 꿈속을 뒤덮는다
한 생애가 적막해서
잠 못 이루는 걸 다 안다는 듯
말랑말랑한 빗소리가
이불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허형만 시집, 황홀, 민음사








주름에 관한 보고서 - 허형만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주름의 골을 파헤치는 세월의 보습이
반질반질하게 빛난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있나요
서유석처럼 흥얼거리다가
면도기가 계엄군인 양 턱을 점령할 때쯤
콧노래를 딱 멈춘다
거울은 심장이 약하다
주름의 골이 깊이 패어 갈 때마다
거울은 한사코 외면한다
한겨울 설해목 부러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또다시 흥얼거리는 내가 쓸쓸해지려 한다.
저물녘 세상에서 화급히 귀가하는 꽁지 붉은 새처럼
오늘도 주름은 황혼을 갈아엎는
보습의 날카로운 이를 두려워하는 것인데
거울은 주름의 깊은 속내를 다 안다는 듯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 누군들 가는 세월을 반길 것인가. 불면증에 잠 못 이루는 노인에게 하룻밤은 지독히 길지만 긴 겨울 뚫고 힘들게 온 봄날이 서둘러 꽃잎 떨구고 떠나는 시기는 지독히 짧다. 세월의 흔적인 주름을 순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파란 것이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시인은 참 긍정적으로 나이를 받아들이지만 그래도 늙음은 서럽다. 생애가 적막한 것도 젊어봤기에 더 절실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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