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숨은 딸 - 오탁번

마루안 2018. 4. 9. 22:20



숨은 딸 - 오탁번



나도 숨겨 논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
'아빠' 부르면서 카네이션 꽂아주며
내 볼에 뽀뽀해줄 보조개도 예쁜 내 딸!
'어험, 어험' 하며 처음에는 멋쩍겠지만
내심으로야 뛸 듯이 좋을 거야
아내는 뾰로통해서 눈 흘기겠지만
덤으로 생긴 딸 설마 구박은 안 하겠지
보름달 따올 만큼 힘세던 내 젊은 날
숨겨논 딸 하나 못 만들고 무얼 했을까
숨겨 논 딸이 없어 민망하긴 하지만
제 발로 숨어버린 딸은 많을지도 몰라
아득한 젊음의 새벽길에서
눈물 훔치며 떠났던 여자들이
나한테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딸 하나 몰래 낳아 키웠을지도 몰라


숨어버린 딸이 운명의 해후를 위해
광속으로 달려와 내 앞에 선다면
DNA 검사 없이 바로 내 딸을 삼을 거야
호적에도 바로 올리고 재산도 나눠주고
큰 눈동자 빛나던
내 젊은 날의 흑백사진 보여줄 거야
아아,우주의 어느 행성 바닷가에서
사랑의 불장난으로 태어난 어여쁜 내 딸아
지구가 혜성에 부딪혀 파멸하는 날이 오면
나는 숨어있던 내 딸을 데리고
빙하기를 견디며 살아남아 있을 거야
몇 천 년 몇 만 년이 흐르고
빙하에 짓눌렸던 한반도가 다시 떠오르면
나는 내 딸을 데리고 화석에서 뛰어나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집 한 채 지을 거야



*오탁번 시집, 손님, 황금알








자명종 - 오탁번


 
젊은 시절
나를 깨우던 자명종을
이제는 내가 재운다
아침 약속이 있거나
지방에 내려가는 날이면
아침 여섯시에
자명종을 맞춰놓지만
언제나 내가 먼저 잠이 깨어
뒤늦게 울리는 자명종을 끈다
 

여행길에서
혼자 호텔에 묵을 때도
늘 모닝콜을 부탁해 놓지만
벨이 울리기도 전에
잠이 깨어
모닝콜 취소 버튼을 누른다
이 세상
다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에
나 홀로 잠이 깬다
 

오늘도 가볍고 쉬운 일만
생겼으면 좋겠다
울지 말고 잘 자라
자명종아
다 쓴 붓
맑은 물에 헹궈서 붓걸이에 걸듯
붓에서 풀리는
흐려지는 먹물처럼
하루해 저물면 좋겠다



*시집, 우리동네, 시안





# 예전에 읽었을 때는 그냥 넘어갔던 시가 세월이 흘러 다시 눈에 들어온다. 특히 자명종을 깨우다 이제 재우게 되었다는 구절이 공감이 간다. 새벽에 깨어 한참을 뒤척거리는 일이 자주 있다. 잠이 많아 베개가 닿기 무섭게 잠이 들었고 늘 두 개의 자명종에게 앞뒤통수를 연달아 맞아야만 겨우 일어났던 것이 엊그제다. 어디 숨겨 논 딸이라도 있으면 이런 수다라도 떨련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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