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픔의 자전 - 신철규

마루안 2018. 4. 8. 18:30



슬픔의 자전 - 신철규



지구 속은 눈물로 가득 차 있다


타워팰리스 근처 빈민촌에 사는 아이들의 인터뷰
반에서 유일하게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아이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타워팰리스 근처를 둘러싸고 있는 낮은 무허가 건물들
초대받지 못한 자들의 식탁


그녀는 사과를 매만지며 오래된 추방을 떠올린다
그녀는 조심조심 사과를 깎는다
자전의 기울기만큼 사과를 기울인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속살을 파고드는 칼날


아이는 텅빈 접시에 먹고 싶은 음식의 이름을 손가락에 물을 묻혀 하나씩 적는다


사과를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끊어질 듯 말 듯 떨리는 사과 껍질
그녀의 눈동자는 우물처럼 검고 맑고 깊다


혀끝에 눈물이 매달려 있다
그녀 속에서 얼마나 오래 굴렀기에 저렇게
둥글게 툭툭,
사과 속살은 누렇게 변해가고


식탁의 모서리에 앉아 우리는 서로의 입속에
사과 조각을 넣어준다
한입 베어 물자 입 안에 짠맛이 돈다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처럼 우리는 먹먹했다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플랫폼 - 신철규



멀리 있는 것들이 궁금할 때가 있다


쉽게 오는 것은 쉽게 가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 멀어지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쉽게 오는 것도 쉽게 가고 어렵게 오는 것도 쉽게 간다
나는 쉽게 와서 쉽게 가고 너는 쉽게 와서 어렵게 간다


건너편 플랫폼에서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저 여자
유리창에 남겨진 손바닥
손금은 입깁을 불 때마다 되살아난다


한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지하철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
간절한 것들은 저마다의 가슴속에서 가라앉고
사람들은 눈을 감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간절했던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나는 나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난자를 뚫고 들어간 정자는 도화선의 생을 마감했다
무한한 세포분열은 죽음을 향해 간다
더이상 분열될 수 없을 때 눈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지구에 모든 경사가 사라지면 돌은 구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멀리 있고
멀리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너는 너무 멀리 있고 또 너무 가까이 있다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내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햇살이 가파른 경사를 그으며 너무 먼 곳에서 와서
내 가까이에서 부서진다 구르는 돌은
언젠가는 멈추고 이끼가 몸을 덮는다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는다





#신철규 시인은 1980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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