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력서를 쓰다 - 김사이

마루안 2018. 4. 9. 21:39



이력서를 쓰다 - 김사이



벚꽃 흐드러져 있는 이 봄밤
어릴 때 온갖 환상 속에서 부푼 둥근 저 달
사람들의 꿈을 얼마나 먹었는지 배가 터질 것 같은 달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좋을 저것은
옥탑방 아래 세상 또 누구의 꿈을 엿보고 있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꿈을 빼앗긴 내 이력엔 무기가 없다
살면서 매 순간 바리케이트를 치고 사는 것은 아닌데
하루하루를 보이지 않는 무엇과 싸우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피 말리는 일이지
물오른 새순처럼 열정이 있다고 적을 수 없고
성실한 직장 경력으로 적금이 꽤 된다고 적을 수도 없고
사회 발전에 기여한 인사도 아니어서,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이력서를 쓴다
어느 곳에도 온전하게 속하지 못하면서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성별은 차별이 되고
갓 태어난 아기의 몸뚱이엔
주홍글씨처럼 부유와 빈곤이 나뉘어 찍힌다
자궁 속 태아에게도 계급이 있고
분노가 일기 전에 서글픔이 밀려들어
달리다 달리다 멈춰선 곳
시간은 자본으로 환산되지 않는 이력을 앞세워
40년 발길이 다시 주춤거린다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 실천문학사








꽃 - 김사이



아직 속살 파고드는 찬 기운에
꽃 핀다 꽃 핀다, 밤마실 나가는 꽃들


도시 주택가 골목에 작은 술집 하나 부산하다
동네 아저씨들 가끔 드나드는 그곳
늙은 아가씨들 달빛 환한 밤에 꽃 따러 나선다
몇 그루의 나무들이 그녀들을 맞이하려는 듯
가지들을 쫙 펼치고
달빛은 더 높아져 투명하기만 하다
열매 맺지 못한 늙은 꽃들은
꽃나무 밑으로 폴짝폴짝 뛰어간다
고향도 사랑도 내일 받을 손님도 잔금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두 잊고, 그저 가만히 놔두고
풋내 나던 시절로 돌아가 재잘거린다
중심을 돌아 돌아 오니
먼 곳도 가까운 곳도 아닌
중심으로 와 있는 그녀들에게
달빛은 부서져 내리고 나무들은 머리카락을 넘겨준다
꽃이 아니어도 꽃이 되는 시간에 있는 그녀들
다시 꽃 핀다
대추나무 작은 잎들이 달빛에 몸을 바꿔 꽃이 되어
작은 꽃잎 하나씩 어깨 위로 떨구어내고
푸른빛 돋아나기 시작하는
이른 봄 어느 날
크고 작은 하얀 꽃잎들이 흩날리던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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