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꽃 피는 내 땅 4월에 - 이기철

마루안 2018. 4. 8. 18:16



봄꽃 피는 내 땅 4월에 - 이기철



이 땅에 온 지도 참 오래 되었다
살아 있기에 이런 물음도 한 번은 물을 수 있는 것인가
참담하다 말하고 싶진 않지만 기실
살은 것이 아니라 견딘 것이라고 해야 하리라


누가 삶의 시간표를 다 짜놓았기에
나는 그 시간표에 길든 짐승처럼 순응했다
열 살 때 학동이 되고 서른에 장가들고 마흔에 집을 이루는 일이야
누구라도 하는 일
그러나 그 시간표는 나 아닌 사람이 미리 짜 놓은 것
나는 남의 시간표에 내 생을 조립했다


이 레디메이드의 생이, 이 설계된 계획표에 이르는 길이 험난했음을
다시금 남의 말을 빌려와 수식한들 무엇하랴
걸어온 길이 아무래도 진달래 꽃빛보단 덜 아름다웠다고 탄식한들 무엇하랴
다만 나는 이 푯대에 나부끼는 깃발 하나 걸어놓고
내 심장의 피가 붉은지 흰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그래도 이 땅에 와서의 시간이
죽고 싶은 날보단 살고 싶은 날이
미워한 시간보단 사랑한 시간이
망각의 시간보단 기억의 시간이
더 많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봄꽃 피는 내 땅 4월에



*시집, 꽃들의 화장 시간, 서정시학








꽃들의 화장 시간 - 이기철

 


처음부터 지기 위해 꽃은 핀다, 니힐이다
처음부터 이름답기 위해 꽃은 핀다, 물활物活이다


꽃들의 생애는 일생이 화장 시간이다
고요의 앞과 뒤, 침묵의 위 아래에
얹어 줄 언어가 없다, 사실寫實이다


지극한 아름다움은 차라리 형벌이다
피맺힌 손가락의 노동으로 꽃은 핀다
저 붉은 노동에는 피정이 없다


한 번 피면 매혹의 중심이 되는 저 입술을 보아라


말을 갖지 않은 것들은 색으로 영혼을 건넨다
꽃들이 색 쓰는 시간이다


벌과 나비들의 견습생들에게 맨몸으로 가르치는
꽃들의 화장술
저 천부의 화장술을 누가 가르치고 떠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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