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미자 - 박소란

마루안 2018. 4. 7. 20:32



미자 - 박소란



밤의 불광천을 거닐다 본다 허허로운 눈길 위
미자야 사랑한다 죽도록,
누군가 휘갈겨 쓴 선득한 고백


비틀대는 발자국은 사랑 쪽으로 유난히 난분분하고 열병처럼
정처 없이 한데를 서성이던 저 날들
미자


미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떠나갔을까


부패한 추억의 냄새가 개천을 따라 스멀거리며 일어선다


겨우내 그칠 줄 모르고 허우적대던 절름발이 가랑눈과
그 불구의 몸을 깊숙이 끌어안아 애무하던 뒷골목
금 간 담벼락마다 퉤- 보란 듯 흘레붙고 싶었던
지천한 허방 속 야생의 짐승처럼 똬리를 틀고 아귀 같은 새끼들을 싸지르고 싶었던
내 불온했던 첫사랑, 미자는


아직 그 어두운 길 끝에 살고 있을까
아니다
아니다 어쩌면
미자는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돌이켜보면
사랑이란 이름의 무수한 날들은 하나같이 사랑 밖에 객사했듯이
눈의 계절이 저물면 저 아픈 고백 또한 질척이는 농담이 되고 말 일


미자는 지금 여기에 없고 사랑하는
미자는 나를 모르고
기어이 내 것이 아니고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푸른 밤 - 박소란



짙푸른 코트 자락을 흩날리며
말없이 떠나간 밤을
이제는 이해한다 시간의 굽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


사소한 사라짐으로 영원의 단추는 채워지고 마는 것
이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누군가의 마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잠시 가슴을 두드려본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낯선 행성에 노크를 하듯
검은 하늘 촘촘히 후회가 반짝일 때 그때가
아름다웠노라고,
하늘로 손을 뻗어 빗나간 별자리를 되짚어볼 때
서로의 멍든 표정을 어루만지며 우리는
곤히 낡아갈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걸 알고도 밤은 갔다


그렇게 가고도
아침은 왜 끝끝내 소식이 없었는지
이제는 이해한다


그만 다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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