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손목에 관한 - 유영금

마루안 2018. 4. 7. 18:38



손목에 관한, - 유영금



처음 패를 돌릴 때는 잘 굴러갔다
잃는 것도 따는 것도 없이 본전을 유지하면서
가끔은 서로에게 개평꾼이기도 했다
그 짓이 깊어지면서
작살나무 이파리들이
기형적인 가을을 끌고 오던 날
눈 깜빡하는 사이 나는
도끼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인생 서른아홉 장을 몽땅 잃었다
아무도 모른다 그 맛을
맛보지 않고 아는 척 하지 말라
나는 오른쪽 손목을 잘라냈다
뒤통수 얻어맞은 그 도끼로,
잘려나간 손의 빈자리를 혼자 봉합했다
오랫동안 피가 솟구쳤지만 시간을 덧바르는 사이
손목은 겨우 꼴을 갖추었다
죽지 않았다 나는
손목을 자르고도 죽지 않은 나를 보며
그 가을 눈이 멀었디
비루悲淚한 꽃잎이 가을마다 벙그러져도
잃어버린 서른아홉 장의 인생을 힐끔대지 않는다
물론 지랄 같은 투전판엔 다시 기웃거리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그곳에서 본전 생각을 하는 자들아
손목을 요주의하라,
그러나 잘려나간 손목으로 밥숟갈 뜨는 일도
꽤 즐길 만하다



*시집, 봄날 불지르다, 문학세계사








새 - 유영금



누가 흐린 하늘을 자꾸 닦아내고 있다

무섭게 파래진다

새파란 물줄기가 주르륵

산마을을 흠뻑 물들이겠다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희끗희끗 숨은 깃털


놀랄 일이다

사월 저무는 날,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울다 날아오르던 한 마리

새,

새가

푸른 가난을 질끈 짜

하늘을 닦고 있다





# 유영금 시인은 1957년 강원도 영월 출생이다. 1994년 <청구문학> 시 대상, 1997년 진주신문 가을문예에 시 당선, 2003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도발적인 첫 시집이 가슴에 독하게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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