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샘추위가 나타나셨다 - 원무현

마루안 2018. 4. 1. 20:01



꽃샘추위가 나타나셨다 - 원무현



올해 들어 유난히도 화색이 도는 이모부가
이발소에 앉아 미소를 머금은 채 졸고 있습니다
염색도 하고 포마드도 발라서
햇살이 내려앉은 듯 반짝이는 머리를 꾸벅입니다
그러다가 무엇에 놀란 듯 화들짝 깼는데요
바로 그때
커트보자락 끝에서 윤기 짜르르 흐르는 백구두가
쑥 나왔다 황급히 들어갑니다
아무도 몰래 누굴 만나러 갈 모양입니다만
우리 이모부 쉰도 훌쩍 넘긴 나이에
소 팔아서 바람을 샀던 일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어서
봄기운 살아나고 꽃 소식 들리면
그 전과를 들춰내서는
밤낮 없이 쌍심지 켜고 문단속하던 여자
이모를 꿈속에서 마주친 게 틀림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창 너머 저 목련나무는 뭐 땜에
열었던 꽃봉오리 도로 닫고 난리래요



*시집, 강철나비, 빛남출판사








봄 마중 - 원무현 



내 목덜미에 칼바람 지나갈 때 아린 것은

오직 그대 가녀린 목 따뜻이 잘 있는지 염려되는 때문이다
하여 겨울이면 내가 노을을 찾아 헤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목도리를 그대 목에 감아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제는 새 생명이 태어나는 산부인과 옥상 아침노을에 취하고
어제는 공원묘지 쓸쓸한 무덤을 덮어주는 운봉산 저녁노을을 끌어당겼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이제는 염려치 마시라
바람 더 맵차게 몰아쳐도 움츠리지 마시라
가끔은 나도 기억되지 않는 내 이름을 끊임없이 살려내는 그 목
길게 뽑아, 수선이 되시라 한 마리 백학도 되시라
오늘 마침내 산 자의 겨울도 죽은 자의 겨울도 함께 감싸는
순천만 서녘 비린노을을 걷으러 가느니
우리 진눈깨비 치는 벌판에 서서 봄을 기다리는 날
한 개 이젤이 되어
황량한 겨울풍경을 받치고 있어도 쓰러지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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