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음의 종로 - 조항록

마루안 2018. 3. 31. 22:21

 

 

마음의 종로 - 조항록

 


마음의 종로에 간다
과객들 목만 축이고 지나가는
내가 우물 같을 때
거기 한 잎 떠 있는 가랑잎 같아
후 불면 비켜나고
부딪히면 바스러질 때
종로는 마음에도 있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
타종하는 보신각을 지나
들어갈 뿐 나오는 것이 아닌
종로서적에 들러 잠깐 뒤적이고
구호물자 배급받듯 해바라기하는
그저 놀라운 탑골공원 지나
갸웃거리는 국일관 거리까지
정처 없는 종로에 간다
오랜만의 잠인 듯 그대로
금방이라도 쏟아지려는 흐린 하늘의
침침해도 붐비는 마음의 종로
사랑을 굴삭하는 피카디리 앞
연인은 서성이고
노을지면 눈매 매서운 사람들의
울고 넘는 목쉰 노래도 듣는다
함께 붐비며 닿는 대로 걷다
다녀오면 가슴께가 찰랑찰랑해지는
마음의 종로


 

*시집, 지나가나 슬픔, 천년의시작

 

 

 

 

 

 

치명타 - 조항록

 


남김없이 불사르고 있습니다
그대 목숨의 열기가
그대를 아프게 합니다
부어오른 잇몸
손톱만한 살 속에 들어앉은
온 정신과 육체
사랑니는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대 근황은 치통으로 확인되는 사랑니
신뢰할 수 없는 사랑니가
그대를 통째로 지배합니다


돌풍처럼


이십 년이 흐른 후 저편
아마도 두툼한 서류봉투를 끼고
오래된 갈색 목도리를 두른 그대는
이 치통을 회상할 것입니다
다시 현란한 통증을 감씨쥐며
쉽게 빠지지 않는 사랑니
반체제적 모습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중년 남자인 그대를
겨울비 내리는 돌담길로
우산도 없이 나서게 할 것입니다

 

 

 

 

# 조항록 시인은 1967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1992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지나가나 슬픔>, <근황>, <거룩한 그물>, <여기 아닌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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