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동행 - 홍순영

마루안 2018. 3. 30. 18:36



동행 - 홍순영



꽃그늘 노란 휘장 걷히고
축제도 끝나 한적해진 마을
그믐달 같은 할머니 허리가
나지막한 담장 골목 들어설 때
익히 안다는 듯 몸 기울여 할머니 안는 담장,
끝을 쫓아 들어가니
아무렇게나 걷어낸 비닐 위로
봄볕 엎어져 있는 할머니의 집


매일 당신이 살아 있나 들여다보는
울타리 밖 나무와 나이가 얼추 같다며,
일본에 가 있는 아들 이야기며
벌써 스무 해째
밥상에 수저는 한 벌뿐이라고
빈 사발처럼 웃는 구순의 할머니 입속에
비 맞은 연등처럼 걸려 있는 두 개의 이
정면도 아닌, 배후도 아닌 곳에 매달려
생을 버티고 있는 저,


산수유 얼크러진 잔뿌리 얼굴에 가득 뻗어
나무가 할머니인지
할머니가 나무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저녁 해 들기 전에 마을 한 바퀴 돌아야지
저물어가는 손이 산수유 비탈진 허리 짚는다



*시집,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문학의전당








등 - 홍순영



생의 이면을 읽는 독법이다
둔감하거나 무관심에 함몰된 자의 시력으론 좀체 읽히지 않는다


굽어있거나, 꼿꼿하거나, 휘어져 있거나
솔직함이 드러나는 대목에서 가끔 울컥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自傳적일 때 솟구치는 짜증도 있다


생활은 정면충돌을 피한 채
우리 등에 맘껏 낙서를 즐기지만
자신의 등에 적힌 적나라한 문장,
본인은 읽지 못한다
때로 삶이 서글퍼지는 건 자의가 아닌 타의로 함부로 읽힐 때
사는 즐거움은 오독 아니겠냐고 말하는 누군가도 있겠지만


품어야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바짝 웅크린 그의 등에서
난해한 대목을 만난 것처럼 내 시선은 같은 자리를 맴돈다
밤이 깊을수록 그의 등은 외딴 섬을 닮아간다
섬을 적시는 거친 파도소리


그의 등에 가슴을 묻는다


아무도 읽지 못한 그를 오늘에서야 제대로 읽기 시작한다





# 홍순영 시인은 인천에서 태어나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을 수혜했고, 2011년 <시인시각> 제5회 신인상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 수주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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