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감나무에 부쳐 - 김추인

마루안 2018. 3. 29. 20:22

 

 

감나무에 부쳐 - 김추인

 

 

칠순도 몇 번은 지났을

늙은 둥치

꼬부라지고 휜 등 뒤로

옹이 박힌 세월이 머물러 있다

 

손가락 사이 주르르 새어나가던

물 같던 모래 같던

꽃각시의 놓쳐 버린 시간들이

이 가을, 발갛게 돌아와

서리하늘 높다랗게 들어올리며

어머니- 어머니-

고향 마당이 시끄럽다

 

큰 놈 작은 놈 잘난 것 못난 것

무지렁이들까지

각질의 비늘 쓰고 앉은

어미의 검은 둥치에 잔가지를 대고

배꼽을 붙이고

떫고 꽉꽉한 속내까지 익히나 보다

 

발 아래 수북이

벗은 옷이 쌓이고

맨살의 어머니는 떠나갈 종자들에게

마지막 젖을 물리고 있다

 

 

*시집, 벽으로부터의 외출, 도서출판 둥지

 

 

 

 

 

 

어떤 외출 - 김추인

 

 

이승이란 곳이 가까워 오는지

몇번인가 왔을

바깥이 시끄럽다

 

어차피 꿈일 터이지만

이런 꿈은 안 꾸는 것이 낫지만

단청빛 열탕의 사랑도

배꽃처럼 희디흰 이별도 있다 하니

이별도 어여쁜 세상이라 하니

 

기왕에 나온 외출

소름 돋치게 질긴

인연 하나 맺고 가자

저잣거리 비린 속에

검불마냥 사소한 일상사도 엮고 가자

왔어도 거듭 왔어도

그립고 그리울

부질없는 이승의

남가일몽일 터이지만

 

 

 

 

# 김추인 시인은 1947년 경남 함양 출생으로 198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의보>, <벽으로부터의 외출>, <전갈의 땅>, <모든 하루는 낯설다>, <프렌치키스의 암호>, <행성의 아이들>, <오브제를 사랑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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