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독고다이 노숙인 - 윤병무

마루안 2018. 3. 28. 23:43



독고다이 노숙인 - 윤병무



홍대 근처 배달 음식점들 중
어느 곳이 장사 잘되는지 어떤 메뉴가 인기 있는지
그는 잘 알고 있다


용산 노숙자쉼터 앞에 줄 서지 않는
그는 수제가구점들 일꾼들이 문 앞에 내놓는
남은 배달음식을 순식간에 청소하는 데 일가견 있다


잘 걸어 다니는 비둘기들에게 배운 노하우다
비둘기들이 위성도시로 떠나지 않고
특별시를 고집하는 이유도 그는 터득하고 있다


비둘기들이 그렇듯 그는
자신의 나와바리를 쉼 없이 돌아다닌다
끼니때 따로 없는 초식동물처럼 틈틈이 영양분을 섭취한다


그러나 털갈이가 필요하지 않은
진화한 인간으로 태어난 탓에 늘 겨울옷 차림인 그가
오늘은 어디서 장맛비를 피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더 젖을 것도 없을 그는 하필
끝내 안 벗겨지는 눅눅한 땅공 같은
인생을 손에 쥐게 되었을까


그마저 내려놓을 어느 날
행려병자(行旅病者) 되어 정식으로 치러지는
염(殮)과 화장(火葬)이라는
첫 사회복지 혜택을 받을 때까지


그는 아직 독고다이 노숙인(露宿人)이다



*윤병무 시집, 고단, 문학과지성








예언 - 윤병무



올 것이 왔는지 초조한 마음에
무작정 거리에 나섰습니다
길들이 걸음을 이끌어줬습니다


훗날에는 당신이 아플 차례라고
낮은 어조로 말했던 사람은
가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지요
주문 읽는 예언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결국
네 병을 깊게 할지어다


그칠 줄 모르는 폭설을 견디고 있는 소나무처럼
마냥 버티다가는 꺾이고 말겠지요 그렇게
겨울 가고 부러진 가지에 돋는 송진처럼 진물 맺히면
지워도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문신(文身) 같은
상처가 손바닥을 덥히겠지요


봄은 왔고
비로소 예언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제 차례가 올 때까지
혼자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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