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픈 뿌리 - 김점용

마루안 2018. 3. 26. 21:32

 

 

슬픈 뿌리 - 김점용
-꿈 31


꽃을 본다 꽃잎이 작고 단정한 진분홍색의 꽃기린이다 잎이 없는 줄기는 가늘다 뿌리가 보고 싶다, 생각하자마자 뿌리가 뽑혀 올라온다 뿌리 끝마다 꽃이 매달려 있다 줄기에 매달린 꽃과 똑같이 생겼지만 아주 작다 그 꽃을 보자 까닭 없이 외롭고 슬프다 누군가 니체꽃이라 일러준다 니체가 맨 처음 발견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단다.... 빈 화분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가 오지 않는다

꽃이 꽃에서 오듯
나도 내가 만든 거 아닐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내가 잠시 빌린 거 아닐까
그러니까 나의 기원이란
바람과 햇살과 물과 먼지가 아닐까
아버지, 호적을 파버리겠어요
대든 적도 있지만
뿌리 뽑힌 꽃을 알몸
알몸의 노래
자기가 세상 전부인 양 우는 어린아이의
저 어마어마한 목구멍
목구멍에 가득한 햇살과 바람
빈 화분


*시집,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 문학과지성


 

 



물의 나라, 자궁
-꿈 34


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은 개천에 비가 와서 물이 거대한 비눗방울처럼 둥글게 부풀었다 불어난 물은 투명해서 물이 불어나기 전의 수면이 겹으로 보인다 수면에 빗방울이 떨어지며 동심원을 그린다 빗물 안에 비가 내리는 격이다 내가 불어난 물속에 들어가 잠긴다 진공 유리 속에 들어온 것 같다 물구나무를 서서 발을 흔들어본다 비눗방울 같은 수면에 닿아 물의 집이 터질 듯하다 사람들이 밖에서 웃는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다시 나온다

정월 초이튿날
어머니는 점쟁이를 찾아 신수를 뽑아 오셨다
복도 없지, 죽거든 제삿밥이나 얻어묵으란다
나하곤 안 맞아 멀리 두라며....
제발 그런 거 믿지 마세요 어머니
그렇게 다짐을 두었지만
점쟁이가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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