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에 소박하게 질문하다 - 엄원태

마루안 2018. 3. 25. 19:41



봄에 소박하게 질문하다 - 엄원태



몸 풀린 청량천 냇가 살가운 미풍 아래
수북해서 푸근한 연둣빛 미나릿단 위에
은실삼단 햇살다발 소복하니 얹혀 있고
방울방울 공기의 해맑은 기포들
바라보는 눈자위에서 자글자글 터진다


냇물에 발 담근 채 봇둑에 퍼질러앉은 아낙 셋
미나리를 냇물에 씻는 분주한 손들
너희에게 묻고 싶다, 다만,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산자락 비탈에 한 무더기 조릿대
칼바람도 아주 잘 견뎠노라 자랑하듯
햇살에 반짝이며 글썽이는 잎, 잎들
너희에게도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폭설과 혹한, 칼바람 따윈 잊을 만하다고
꽃샘추위며 황사바람까지 견딜 만하다고
그래서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시집, 물방울 무덤, 창비








어떤 잠꾸러기 - 엄원태

 


누가 가장 심한 잠꾸러기냐고 혹 묻는다면 글쎄, 맨 먼저 떠오르는사람은 권영식씨다. 그는 투석받는 내내 작정한 듯 잠을 잔다. 네 시간 반 투석 끝나 바늘 빼는 동안에도, 또 지혈 끝나 반창고를 붙이고도 내처 잔다. 나중엔 간호사가 와서 "권영식씨! 집에 가서 주무셔야죠!"하고 몇번 부르며 흔들어 깨우면, 그때서야 부스스 일어나 휘청휘청 집으로 돌아간다.


다른 환자들 그의 잠을 부러워한다. 우리의 영식씨는 '영원한 휴식'이란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셈. 하긴 멀쩡한 대낮 너덧 시간을 꼼짝없이 누워서 견디기란 호락호락한 일 결코 아니다. 그의 잠 비결을 궁금해하는 내게 간호사 귀띔해준바, 그는 갸륵하게도 병원비를 손수 조달하시느라(?) 도원결의 친구들을 불러모아 고스톱을 치시는데, 그게 날밤을 꼬박 새우는 일이란다.


어쨌든 잠이란, 무언가를 오롯이 견뎌내야 하는 때 가장 좋은 친구, 그야말로 휴식 같은 친구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히 잠든 그의 얼굴, 수척한 몸피에 밴 저것은 고스란히 괴로움과 슬픔이 아니면 무어란 말이던가.





# 질병으로 병원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에게 봄이란 계절은 더욱 특별할 것이다. 시인 또한 지병이 있어 병원에서 바라본 풍경이 유별했을 터, 살아 있다는 것이, 이런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봄소식이 기쁘기 또한 마찬가지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픈 뿌리 - 김점용  (0) 2018.03.26
대화의 일치 - 임곤택  (0) 2018.03.25
왼쪽에 대한 편견 - 정호승  (0) 2018.03.25
일요일 오후 세 시 - 박제영  (0) 2018.03.25
자화상 - 김언  (0) 2018.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