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비는 그렇게 내린다 - 이승희

마루안 2018. 3. 24. 20:23



봄비는 그렇게 내린다 - 이승희

 


칼끝은 굳이 내 몸에 저의 생을 기록하고 싶어했다. 그 저녁의 바깥에서 내가 개처럼 나를 핥는 동안에도 날 버린 마음들 환하게 불빛으로 켜지고, 마음 없는 몸은 창백하게 앉아 뼈를 깎는다. 칼이 혀끝을 부드러운 적막처럼 지나고 눈썹 위에서 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붉은 불빛들이 구슬처럼 흘러 천국의 불빛처럼 반짝이고, 날 버린 마음들도 황홀했다. 봄비를 맞으며 비로소 내 몸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먼지 같은 시간들이 뭉쳐지는 저녁, 죽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저녁은 저녁의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어둠이 흰옷을 갈아입고 이제 비로소 절망한다. 발 딛고 서 있는 모든 것들에게 안녕을, 봄비가 내린다.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다시 봄비는 내리고 - 이승희



봄비라는 말 속에서 너를 만났다. 지친 뒤척임만 가득한 눈을 보며 그 속으로 살러 가고 싶었다. 낭떠러지 같은 말 봄비 속에서 너와 사랑을 했다. 비명도 없이 절벽을 뛰어내리던 꿈. 너와 살고 싶은 저녁이 봄비라는 말 속에 있다. 천국이 있다면 봄비라는 말 속에서부터 시작될 거라고 나무들이 키를 키우며 책처럼 펼쳐지던 날 있었다. 아주 오래전 거짓말처럼 또다른 생이 시작되었고 , 단절은 나를 멈추게 하지만 절벽은 나를 뛰어내리게 하였다고 나는 기록한다. 나의 절망은 비루하였고, 꽃이 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날들이 네가 떠나간 흔적처럼 남았다.

봄비를 맞으며 골목을 지나가는 연인들, 저들은 서로를 버티느라 또 얼마나 힘겨울 것인가. 내가 없이 봄비가 내리는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