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안개 풍경 - 유계영

마루안 2018. 3. 23. 22:41



안개 풍경 - 유계영



안개를 뒤집자
호주머니 속에서 변신이 튀어나온다


신짐승에게 발을 먹히지 않으려면
장갑을 신고 자는 습관을 들이도록
이것이 언니에게 배운 예절의 이름


우리는 눈코입이 뚫리지 않은 가면을 써야만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날고기가 지겨우면 산불을 놓았다


밤마다 산짐승들이 악수만 하고 돌아갔다
나는 밤새도록 바지를 적셨다


터미널 인근의 여관방에서 애인의 변심을 비관한 언니가
자살에 실패하고
십자말풀이에 몰두하고 있었다
황갈색 오후를 물고 반짝이는 약병들


마지막 단어을 일러 주기 위해
만가를 부르기로 한다


못 생긴 시절에 쓴 일기처럼 미래 지향적으로
새 장갑을 마련해야지
낭떠러지 끝에 언니가
모스 부호처럼 매달려 웃는다



*시집, 온갖 것들의 낮, 민음사








시작은 코스모스 - 유계영



낮보다 밤에 빚어진 몸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병이 비치는 피부를 타고났다


모자 장수와 신발 장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끔은 갈비뼈가 묘연해졌다
죽더라도 죽지 마라
발끝에서 솟구쳐


사랑은 온몸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나의 바지다
나도 죽어서 신이 될 거야
그러나 버릇처럼 나는 살아났다


검은 채소밭에 매달리면
목과 너무나도 멀어진 얼굴
두 마리의 물고기가 그려진 국기처럼 서로 마주 봤다


멀리서부터
몸이 다시 시작되었다
젖은 얼굴이 목 위로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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